풍납토성은 백제의 첫 도읍지였을까.
2022. 6. 14. 11:3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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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첫 도읍지는 위례성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위치에 대해서는 미궁에 쌓여있습니다. “북으로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언덕을 의지하며 남으로 기름진 땅을 바라보며 서로는 대해를 격한 지리점 이점을 취해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삼국사기』
이렇게 기록에서 전하는 바지만 이런 글이 지금에 와서도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발굴을 통하여 백제의 첫도읍지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2000년 초에는 풍납토성내의 한강변의 아파트 현장에서 백제 초기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말뼈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여(呂)자 형태의 건물지, 그리고 대부(大夫)라고 새겨진 토기편도 발견되었는데요. 이러한 발견은 백제 초기의 모습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였습니다. 예를 들어 ‘대부(大夫)’라고 하는 것은 관직 명칭으로 이해되지만 그동안 백제에서는 이러한 관직이 보고된 바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없었는지 아니면 있었는데 아직 모르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글이 새겨진 토기조각과 함께 발견된 말뼈는 머리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발견된 토기는 고급 토기였습니다. 당대에는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질 정도로 비싼 말과 함께 발견된 고급 토기는 이 곳이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궁금하게 합니다. 이와 더불어 여(呂)자 형태의 건물지에 대해서는 아마 제사터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신사가 발견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풍납토성 안에서는 전돌이라고 하는 고급스러운 돌도 발견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다른 백제 지역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편 지난 2004년에는 풍납토성 안에서 수많은 기와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당과 평기와, 초석(주춧돌), 토관 등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인데 이러한 유물은 이곳이 예전에 궁성(宮城)과 관청 등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 존재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니다. 시기는 3~5세기의 것으로 200여 상자에 달하는 상당한 양이었고 한강과 인접해 원래 풍납토성의 서벽이 지나갔을 것으로 예상했던 지역이었는데 서벽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아 성의 내부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발견은 종전까지 있었던 석촌동고분과 몽촌토성, 기존 풍납토성 발굴유물에서 발견된 것을 압도할 만큼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또한 유구로는 다양한 수막새편이 현재 30여점 이상, 완형으로 복원된 수키와가 20여점 이상 나온 대형 유물폐기 구덩이와 함께 각종 동물뼈, 패각류, 토기, 기와 파편 등 제사 등 의례를 지낸 뒤 폐기한 제의관련 유구로 추정되는 소형 구덩이 등이 보고된 것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풍납토성 인근은 침수피해가 심한 곳이라 사람들이 잘 살지 않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이야 개발을 해서 사람들이 살지만 그 옛날에는 사정이 달랐던 것입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이러한 이유로 이곳이 과연 초기백제의 도읍지였을까 하는 의문에서 여전히 고개를 젓게 만드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몽촌토성이 위례성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1997년 풍납토성이 발굴하고 이곳의 유적이 몽촌토성보다 앞선 것으로 판명되자 기존의 생각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또한 침수피해가 우려된 지역이라 그 옛날에 이곳에 사람이 살았을까 싶었지만 고구려나 신라에서도 하천을 끼고 도성을 지었다는 점에서 생각이 바꾸게 되었는데요. 하천은 그야말로 천연요새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고 중국에서는 당시 토성을 쌓았으므로 이러한 기술이 백제에도 전해져 토성을 쌓았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성은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져 원나라시대에도 활용되었는데 이러한 토성은 우리의 생각보다 석성에 비해 견고하였으니 고대국가에서도 선호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지난 2018년에는 울 풍납동 토성(국가사적)의 서쪽 성벽 구간에서 ‘외벽’(바깥벽) 구간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따라 남은 서쪽 성벽의 폭은 최소 31m를 넘어설 것으로 보여 그 장대한 규모를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본래 풍납토성의 서성벽을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일어난 을축년 대홍수 때 모두 쓸려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03년 옛 삼표산업 사옥 신축예정터 일부에 대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시굴조사로 기초부분 흔적이 나온데 이어 2017년 10월 연구소가 같은 구역에서 토성 서남쪽의 내벽 일부와 문터로 추정되는 유적을 찾아내면서 서성벽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기존 통설은 근거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풍납토성 서쪽 성벽의 내벽와 외벽의 존재를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풍납토성이 백제가 한성 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 왕성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백제에는 변변한 성곽조차 없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당시의 백제는 변변한 성곽조차 지을 수 없는 작은 단위의 부족국가라는 사실을 알리지만 풍납토성흔적의 발견은 이러한 기록을 갸우뚱하게 합니다. 현재 2.2km정도 되는 풍납토성은 본래 3.5km가 넘는 대규모의 토성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토성 아랫부분 너비는 무려 40m였고 높이는 10m가 넘습니다. 또 성 내부 발굴에서는 넓은 면적의 주거지와 도로, 수로, 대형 건물터, 우물, 제사용 토기, 말 머리뼈 등 수만 점이 쏟아져나왔다는 점은 이 곳이 바로 한남 위례성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럼 혹시 이 토성은 후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발견된 목재와 숯으로 방사선 연대측정한 결과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과학적 근거로는 이곳에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에는 상당한 힘을 가진 고대국가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결과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건축물을 지을려면 연인원 100만 명이상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읍지였다는 설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 토성이 언제 축조되었을까가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9년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 중앙부를 조사한 뒤 기원전에 축성을 시작해 3세기 중후반 성이 완성됐다고 발표했으나, 2011년에는 동쪽 성벽의 다른 지점을 발굴한 결과 3세기 중후반 착공해 5세기 중반까지 증축됐다고 밝혔습니다. 만약 기원전에 축성을 시작했다면 기원 전후부터 300년까지의 시기를 고대국가의 기틀이 잡히지 않은 시기로 규정하는 일부 고고학계의 의견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한편 백제의 첫수도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이견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그 후보로 요즘 거론되는 지역은 옛 이름인 직산인 곳으로 바로 현재 천안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문헌자료가 많습니다.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동국사략』, 『세종실록』, 『고려사』, 『삼국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동국지리지』, 『여암전서』, 『동사강목』, 『대동지지』에서 1926년에 나온 최남선의 『단군론』까지 고려시대에 편찬한 책부터 20세기에 나온 책까지 모두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을 충청남도 직산을 지목하였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 한산 부아악에서 바라본 위례성을 서술해 놓았는데 이를 토대로 보면 직산지역이 맞다는 것입니다. 또한 위례산성에 있는 용샘에서 백제시대 최대 규모인 목곽고가 발견되는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된 것도, 직산이 위례성 지역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선의 세종은 백제 시조에 대한 사당을 백제의 첫 도읍지에 건립하라고 명했고 그에 따라 직산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조를 포함하여 고구려에서 남하한 십신(十臣) 중 온조, 마려, 조성, 전섭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온조는 백제의 건국 시조, 마려는 천안지역의 목천 마씨의 시조, 전섭은 천안 전씨의 시조, 조성은 직산 조씨의 시조로 직산지역이 백제의 첫 도읍이며 B.C18년에 백제를 건국한 후 이후 나라가 팽창하자 온조왕 13년인 B.C. 5년에 도읍을 현재 경기도 광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은 아마 도읍을 한 차례 옮긴 이후의 중심지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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