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서 건너온 일본유학의 아버지 왕인
2022. 6. 22. 21:2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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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이 (일본에) 아직기를 보내 좋은 말 2필을 바치니 아직기에게 말을 돌보게 하였다. 그런데 아직기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왕이 아직기에게 '그대보다 더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하고 물으니 아직기는 '왕인이 뛰어납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은 곧바로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초빙했다. 왕인은 태자의 스승이 되어 여러 경전들을 가르쳤는데 태자가 배우는 데 막힘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의 시조이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책 『일본 서기』에 실린 백제 박사 왕인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왕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태자의 스승으로 학문을 가르치고 천자문과 논어를 전할 만큼 학식이 뛰어난 사람으로 그의 이름 뒤에 붙는 박사란 칭호는 백제에서는 어느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실력은 갖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한 국가의 제일가는 석학이었던 사람이 왕인입니다. 백제의 제일가는 학자인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국제정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고구려가 압박을 해오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백제의 아신왕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태자 전지를 일본에 볼모로 보내는가 하면 왕인과 아직기 같은 전문가들이 일본에 건너가 백제의 문화를 전수해 준 것입니다.
왕인은 지금의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서에서 왕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시피 합니다. 그의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만 출생연도와 사망연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는 사실만이 있습니다. 당시 백제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적인 기술자들에게 박사칭호를 부여하여 의박사·역박사(曆博士 = 卜筮)·노반박사(鑪盤博士)·와박사(瓦博士)등을 두었으며 오경박사는 역(易) ․ 시(詩,) ․ 서(書) ․ 예(禮) ․ 춘추(春秋) 등 경학(經學)에 통달한 전문적인 석학에 부여하는 칭호였습니다. 이른 나이에 오경박사가 된 그가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공부한 곳이 남아있는데 그 곳이 바로 ‘책굴’이라는 곳입니다. 이 곳은 월출산 문필봉 산기슭에 위치한 석굴로 폭 2.5m, 길이 7m, 높이 5m 정도의 직사각형 굴인데 왕인이 공부한 굴을 후대에 책굴이라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책굴 앞에는 왕인박사의 후덕을 기리기 위해 조각한 왕인 석상이 있다고 합니다.
왕인은 20세의 나이에 자신이 나온 학교라 할 수 있는 문산재의 조교가 되었습니다. 문산재는 왕인이 8살 때 입문한 학문기관으로 당시 수많은 선비들을 배출한 학문의 전당같은 곳이었습니다. 당시 왕인은 후학양성에 뜻을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명성을 자자하여 왕은 그를 불러 태자의 스승으로 삼고자 했으나 왕인이 이를 거절합니다다. 하지만 아신왕은 종종 왕인을 초청하여 전지와 서로 벗하도록 하였으니 태자의 전지의 학문실력도 왕인의 가르침으로 인해 빼어난 수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왕인박사가 일본에 전한 것 중에 천자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자문은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으로 시작하는 천자문인데요. 그런데 이렇게 시작하는 천자문이 만들어진 것은 6세기 초라고 하니 왕인이 살던 시기와는 안맞습니다. 따라서 왕인이 일본에 가지고 간 천자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으니 인의일월 운로엄상(仁儀日月 雲露嚴霜)’으로 시작하는 종요천자문이라고 합니다.
왕인을 초대한 사람은 일본의 응신천황이었는데 왕인은 응신천황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자문과 논어는 물론, 국가운영과 관련된 제도를 마련하고 시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교문서 해독과 작성에도 관여하였으니 왕인은 일본 고대국가 기틀의 마련에도 크게 도움을 준 것입니다.
'해신의 바다와 수많은 흰 파도를 넘고 넘어서 여덟 섬나라에는 글이 전해졌노라'
왕인박사를 칭송하는 일본천황의 글에서 그가 얼마나 일본 고대사에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왕인박사는 고대일본귀족들이 짓고 암송한 전통 정형시 와카의 창시자이기도 하니 왕인이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왕인이 지은 '난파진카'는 최초의 와카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시는 닌토쿠일왕을 난파일왕이라 부르며 즉위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왕인은 일왕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도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왕인의 활약은 백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멀리 일본에서도 두드러졌습니다. 왕인의 활동은 일본고대문화의 발달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 한 사람의 활약만으로 고대 문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왕인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일본과 백제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오경박사를 비롯, 재봉녀, 직공, 야공, 양주자, 도공, 안공, 화원, 금공, 의사 등 일본에 건너가서 백제문화를 전수하여 일본고대문화발달에 기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문화를 일으키는 데 힘을 보탰고 그렇게 건너간 사람 중에 왕인박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그 후예들이 일본 나라문화와 관동문화를 일으킨 일본문화의 뿌리를 이루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왕인은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묘는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타시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사카 광광국 홈페이지에도 '백제 출신의 위대한 학문의 시조 왕인이 잠든 곳'이라 하여 왕인의 무덤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왕인의 묘에 대해 진위여부가 제기되었습니다. 본래 이 무덤이 '오니바카' 즉 귀신무덤이라 불렸는데 이 바위의 이름인 '오니'와 왕인의 일본어 발음인 '와니'가 연결되어 '와니바카' 즉 왕인의 무덤이 되었다는 주장이 17세기 후반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발음의 유사성으로만 이 바위가 왕인의 무덤으로 둔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름 사료를 바탕으로 이 바위가 왕인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것인데요. 해당 사료에 따르면 왕인이 죽은 이후 그의 후손들이 시조 왕인의 무덤을 가와치 그러니까 지금의 오사카 일대에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니의 무덤으로 와전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료들이 과연 오니바카라고 불리는 바위가 왕인의 무덤이라고 뒷받침할만한 것인지 의심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료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왕인의 무덤이라는 생각되는 곳에 왕인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1993년에는 문화재 보호 조례에 사적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왕인의 무덤이 진실이라면 상관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왕인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 게 밝혀진다면 그저 아니구나 하고 넘어갈 수만 있을까요. 불과 100여 년 전 누군가의 무덤인지도 모를 바위가 왕인의 무덤으로 둔갑하여 일본의 내선융화의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정말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1980년대 중반에는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준 백제의 왕인이 『백제서기』를 편찬한 고흥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 학설을 제기할 당시 왕인이 일본 역사책에만 기록되어 있고 우리 기록에는 없다는 점과 왕인이 천자문을 전해줬다는 시기는 백제에는 한문이 없던 때이며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고흥이 백제의 첫 박사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든 것입니다 .
일본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왕인, 하지만 우리 측의 자료는 너무 빈약하기만 한데요. 일본에서는 아직도 왕인의 이러한 업적이 빛을 발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왕인을 모시는 신사가 곳곳에 있으며 이곳은 현재도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일본에서 왕인은 학문의 신으로 우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출생과 사망연도, 백제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의 무덤이 의문투성이지만 왕인이 고대 한국과 일본의 우호적인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인데요. 그에 따라 전남 영암군은 일본 간자키시 왕인박사현창공원에 '백제문'이 건립되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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