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일관계를 푸는 거대한 열쇠 칠지도

2022. 6. 17. 10:5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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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

고대 국가 시절부터 국가 간에 교류가 있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국가 차원에서 상대 국가에 사신을 보내 선물을 주고받았는데요. 기록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고대로 갈수록 이런 선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따라서 국가 간의 관계를 푸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유물일 경우 서로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내놓기도 됩니다. 자칫 이러한 해석 한 줄이 역사의 진실을 뒤집을 수도 있어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유물은 바로 일본에 있는 칠지도로 특이한 외관 덕분에 그렇게 불리는 것 같습니다. 이 칼은 곱게 뻗은 일반적인 모양이 아닌 나무에서 가지가 돋아난 모습인데 좌우로 3가지씩 뻗어나와있는 모양으로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장식용으로 보이는 칼입니다.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이 칼은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오다가 1874년에 공개되었는데 이소노카미신궁은 우리나라 조선시대로 치면 서원이나 향교에 비교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 칼이 보관되어 있던 이소노카미신궁의 다이쿠우시 즉 주지와 비슷한 임무를 맡은 간 마시모토는 칠지도를 다시 발견해 냈습니다. 간 마시모토는 칼에 새겨진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칼로 녹을 긁어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훼손의 가능성도 있었을 겁니다. 하여간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이라 생각되는 이 유물은 일본에서는 상고(上古)의 유품이라 하여 매우 귀하게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글자는 금으로 상감되어 있다고 합니다.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는 금으로 상감된 것이 확인된 것이 없어 당대 최고의 공예기술을 가진 백제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백제의 금세공능력이 뛰어난 것은 백제금동대향로를 보면 알 수 있으며 백제금동대향로가 칠지도에 비해 후대의 작품이라 하여도 이러한 기술이 과거 백제 장인의 비결이 축적되어 이어져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칠지도에는 60여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백제라는 글자도 있어 백제에서 온 물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칼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에는 없고 일본 서기에는 신공황후(神功皇后) 52년 가을 9월에 백제에서 왔다고 합니다. 다만 이 유물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일본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앞면‘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鋼七支刀□百兵宜供供候王□□□□作’
(태○4년○월16일병오정양조백련철칠지도○○백병의○공후왕○○○○작)"
뒷면‘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선세이래미유차도백제왕세○기생성음고위왜왕지조전○후세)"
앞면의 명문은 "태○ 4년 ○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백번 단련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수많은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후왕(侯王)에게 베푼다"이라고 풀이된다고 합니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풀이에는 한일 양국에 크게 엇갈리지는 않으나 ‘候’의 의미를 두고 우리나라와 일본이 엇갈린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候’는 제후할 때 쓰이는 후로 왕이 신하에게 쓰는 표현 더 정확히 말하면 좀 더 위에 있는 나라가 제후에 해당하는 나라의 왕에게 사용하는 호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백제왕은 일왕을 일본의 대표로 인식했으며 백제와 일본의 수직적인 관계를 명시한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백제는 이러한 칠지도의 문장을 통해 일본이 백제의 영향권 아래 두고 있음을 명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일본의 해석은 ‘후’가 부귀한 사람에게 쓰이는 표현이며 다른 문헌에도 발견된다고 합니다. 뒷면의 문장 같은 경우는 더욱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리 이와 같은 칼이 없었노라. 치세 기묘하고 백제 치세에 기묘하고 성스러운 일이 생겨 왜왕을 위해 이 칼을 만드니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고 풀이하고 있으며 일본은 ’지금까지 이런 칼은 없었습니다. 백제왕과 세자가 성음에 기대어 살아 왜왕 지를 위해 제작하오니 후세에 전해주소서‘라고 풀이합니다. 즉 우리나라는 칼을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고 일본은 이 칼이 백제왕이 왜왕에게 충성을 서약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칠지도 명문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래서 문장을 토대로 학자들은 연구를 계속 해왔습니다. 간 마시모토는 앞면의 글자 泰□四年에서 안보이는 부분을 ‘始(시)’자로 보아서 ‘泰始(태시)’로 판독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태시를 연호를 사용한 나라는 중국의 서진의 연호로 때는 268년입니다. 그런데 252년에 백제왕이 헌상했다고 판독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서기 신공황후에 ‘백제왕이 왜왕에 칠지도를 바쳤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 일본학자들은 268년에 제작된 칠지도를 252년에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쳤다고 아이러니한 해석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칠지도의 명문해석으로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인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연호 ‘태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왔고 태시 사년이 아닌 ‘태화 4년’이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태화(太和)’는 중국 동진 폐제의 연호로 태화 4년은 서기 369년이며 그 시기는 근초고왕 24년입니다. 그리고 이 칠지도는 369년에 백제 왕실에서 만들어져 372년에 보낸 것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칠지도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칠지도의 길이가 75cm인데 동진에서 사용한 1척의 길이가 25cm이므로 3척으로 맞아떨어지고 근초고왕이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라는 작호를 받기도 해서 369년이 유력해 보입니다.
한편 『일본 서기』 「신공기」에 따르면 신공 49년 즉 서기 369년에 “‘야마토 정권’이 신라를 치고, 낙동강 중류 이남의 7국을 평정하여 ‘枕彌多禮(침미다례)’를 백제에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일본 입장에서는 일본 야마토 정권에 백제가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이 칠지도를 바쳤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 ‘태화’라는 연호에 대해서 백제가 독자적으로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백제가 상국인 입장에서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라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것에 의문이 생긴다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제후국 위치에 있는 백제가 또다른 제후국 일본을 후왕이라 칭하며 칠지도를 하사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칠지도를 주었을 당시 백제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정도로 국력이 상당했고 실제로 무령왕릉의 지석에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칠지도와 관련, 한일 양국의 해석을 돕기 위해 당시의 국제정세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369년 혹은 또다른 학자가 주장하는 372년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칠지도가 제작되어 건너갔다면 그 시기는 근초고왕시기입니다. 당시 백제의 국력은 최고조에 있던 시기로 369년에는 백제로 침입한 고구려의 군대를 물리쳤으며 372년에는 평양성으로 쳐들어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사망케 할만큼 백제는 강했습니다. 하지만 일본학자들 중에는 당시 고구려의 위협을 받고 있던 백제가 군사적 지원을 약속 받기 위해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합니다. 당시 백제의 국력을 생각하면 일본왕에게 이 칠지도를 바쳤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특히 백제의 왕인과 아직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과 여러문물을 전하였는데 그 시기도 근초고왕 때입니다. 문화적으로도 국력도 강했던 백제가 아마 이 시기에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면서 백제왕이 칠지도를 왜왕에게 하사했다가 자연스러운 해석이 아닐까요.

칠지도에는 고대 한일관계의 비밀을 숨겨져 있다.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칠지도가 우리나라에도 복제품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유는 한일양국이 이 칠지도가 훌륭하게 보전하여야 할 고대유물이라는 점에는 공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 이게 명문해석보다 더 중요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올바른 해석으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을 가벼운 일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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