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산수와 이상향을 품은 산수무늬벽돌

2022. 6. 27. 21:2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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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무늬벽돌

우리나라에서 세계 각국의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인데요. 국가 간에 문화교류가 이루어지면서 해외문화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반인들에게 공개가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화재 역시 해외에 잠시 반출되어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럼 해외에 가장 많이 반출된 우리나라 문화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보물로 지정된 부여 외리 문양전입니다. 이름이 다소 생소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백제 산수무늬벽돌이라고 불리는 유물이 포함된 것입니다. 이 유물들은 비교적 단단하고 치밀한 바탕흙을 사용하였으며 문양을 양각한 것이 특징입니다. 벽돌의 성격이나 제조법을 미루어 볼 때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며 일본 오사카에 출토된 봉황문전 등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외에 많이 반출된 문화재 2위와 3위로는 도기 기마 인물형 명기와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수많은 문화재를 제치고 백제 문양전이 해외나들이 잦은 문화재 1위를 차지했던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산수문전과 귀신문전의 경우 비슷한 문양이 2점씩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문화재에 비해 도난에 대한 부담이 덜한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금은 세공품이 아닌 벽돌이기 때문에  훼손가능성이 적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되겠습니다.

부여 외리 문양전 일괄

 이런 백제 산수무늬벽돌이 포함된 백제 문양전은 어떤 문화적 가치를 지닌 것일까요. 교과서에서도 본 적이 있는 백제산수무늬벽돌을 포함한 부여외리 문양전일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장식품이란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산수무늬벽돌은 '산수문전'이라고 하는 것으로 산, 나무, 하늘, 사람 등이 어울린 산수인물화인데 당시 산수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백제산수무늬벽돌은 하단에 가운데 산들을 직선으로 표현하였으며 배경이 되는 산들도 실제 보이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대칭형의 곡선 형태로 표현하였습니다. 백제인들의 뛰어난 예술감각을 엿불 수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물이 흐르고 산중턱에 누각이 서있는 모습이 보이는데요. 이 누각을 향하여 한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벽돌장식이라고보다는 산과 물, 그리고 사람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인 것 같은 이 산수무늬벽돌은 산수인물화의 기원이 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발굴된 산수봉황무늬벽돌은 위와 아래로 나누어져 표현되었습니다. 위에는 구름과 봉황무늬를 표현하였고 아래에는 산수무늬가 표현되었습니다. 마치 천상계와 지상계를 담아놓은 듯한 이 장식은 백제문화의 정수 백제금동대향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늬세트를 만든 장인이 혹시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든 장본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일게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벽돌은 백제산수무늬와 합치면 산모양이 한 쌍을 이루기도 하고 같이 출토된 용무늬벽돌과 봉화무늬벽돌, 그리고 연꽃무늬벽돌과 연꽃구름무늬벽돌을 합치면 꽃모양이 나타나게 됩니다. 작품 하나로도 아름다운 문양을 나타내지만 합쳐지면 또다른 백제인들의 미적 감각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부여 외리 유적에서 출토된 무늬 벽돌

이와 함께 산수무늬를 배경으로 도깨비가 새겨져 있는 산수귀문전, 소용돌이치는 용의 모습을 그린 반룡문전, 봉황 한 마리를 묘사한 봉황문전, 구름이 소용돌이치는 와운문전, 커다란 씨방을 중심으로 12개의 연화판이 둘러진 연화문전등 각각의 무늬만으로도 백제 예술가들의 독특한 디자인감각을 알 수 있으며 개별로도 예술성을 지닌 이 작품들을 합쳤을 때 연속적인 꽃무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제 산수무늬벽돌은 말 그래도 산수화를 표현한 벽돌장식입니다. 산수화는 중국 육조 시대에 탄생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무래도 미숙함이 역력한데다가 육조시대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중국에서는 물을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다고 하는데 백제문양전에서 보이는 물은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모습이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백제시대의 산수화는 하나의 장르로써 이해할 수 있으며 같은 시대의 고구려, 신라는 물론, 중국, 일본과도 비교해도 빼어난 예술품이자 백제인들의 원만하고 부드러운 이상향이 깃든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고분에 그려진 선인(仙人)이나 백제 무령왕릉의 진묘수, 백제 금동대향로는 중국의 도교가 이미 삼국시대에 전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도교문화 위에 백제 고유의 기술로 백제인들의 이상향을 표현하였습니다. 금동대향로가 그 대표적인 문화재이며 산수무늬벽돌로 불리는 부여외리 문양전 일괄도 그 연장선에 있는 유물로 볼 수 있습니다.
백제시대의 산수무늬를 엿볼 수 있는 백제문양전이 발견된 것은 1937년으로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의 절터입니다. 그리고 이 백제 문양전이 발견되기 앞선 1907년에는 농부에 의해 쇠솥에 들어 있는 백제금동관음보살상 2구를 발견했으며 1937년에 아리마쓰 교이치 등 일본학자들이 불상 발견 지점에서 불과 100여 미터 지점에서 4쌍 8종류의 문양전을 발굴한 것입니다. 그리고 1907년에 발견된 백제 불상 중 하나는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1937년 이 벽돌무늬들이 발견된 터는 어떤 곳일까요. 아쉽게도 국가종교시설이라는 추정만 있을 뿐, 더 이상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후속조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곳은 조선총독부가 발굴하였고 약 20점의 무늬 벽돌이 나왔습니다. 산수무늬·산수봉황무늬·구름무늬·연화무늬 등의 벽돌이 나왔고 용과 도깨비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입을 크게 벌린 귀신무늬 벽돌도 출토되습니다. 처음에는 백제 때 만든 것을 후대 사람들이 가져다가 바닥에 깐 것으로 생각했는데 연구결과 원래는 타일처럼 벽을 장식했던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634년 2월 왕흥사가 완성됐는데 채식이 화려하고 장엄했다. 임금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 
왕흥사는 위덕왕 24년인 55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무왕 35년인 634년에 완성된 국가사찰입니다.  그래서 이 벽돌들은 아마 왕이 행차하는 이 화려한 사찰 왕흥사를 꾸미는 벽돌장식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어느 순간 왕흥사 터에 남아 있던 유물들이 흩어졌다고 보는데 이는 모두 추정입니다. 그리고 이 백제문양들은 바닥재라기보다는 건물의 벽을 장식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우리가 백제하면 떠오르는 문화재들 그러니까 백제금동대향로라든가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상, 그리고 이 벽돌무늬와 함께 이 벽돌이 나왔다고 추정되는 왕흥사가 백제 후기의 유적, 유물들입니다. 즉 백제문화의 정수가 빛을 발하고 있을 때쯤, 백제는 시기적으로 점차 멸망의 때를 향해 급발진하고 있던 것입니다.
 숱한 고난과 역사의 파도 속에서 백제는 600년 이상 존속하였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 왕조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교류하며 문물을 주고받는 동시에 백제만의 문화정체성을 확립해 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 외리에서 발견된 문양전, 서산마애삼존불상 등은 그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황급히 묻혀진 것처럼 보이는 백제금동대향로라든가 산수무늬벽돌이 포함된 외리 문양전이 이전의 용도를 알 수 없는 터에서 발굴된 것을 생각하면 뛰어난 백제문화재를 보며 더불어 망국의 향기를  느끼는 사람도 더러 있을 건데요. 하지만 백제문화가 이렇게 꽃피우던 7세기 초반 백제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던 게 아니고 다시 도약할 준비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도 하게 됩니다. 만약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많은 놀라운 백제예술작품들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러한 작품들이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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