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령왕릉이 알려주는 사실

2022. 6. 29. 16:1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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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당시 무령왕릉의 노출 상태

충청남도 공주시는 백제의 수도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무덤들이 있는데 왕과 귀족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큰 무덤입니다. 무덤이 발견될 당시의 행정구역 명칭을 따서 무덤이름을 지었는데 그리하여 명명된 송산리 고분군은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무덤들은 굴식돌방무덤의 양식을 띄고 있습니다. 시신을 넣은 나무 관이 있는 널방을 돌로 쌓아 만든 다음에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씌운 양식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도굴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단서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동네 이름이나 나온 유물에 따라 무덤의 명칭이 붙였습니다. 
1971년 초, 송산리 고분군 중 5호분과 6호분으로 빗물이 흘러내려 무덤에 물이 찰 우려가 있어 배수로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6호분 뒤편 언덕에서 땅을 파다가 딱딱한 게 걸렸고 이는 바로 새로운 무덤의 발견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무덤으로 2개의 목관과 함께 순금관 2개가 나왔습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62재립지여좌합장(才立志如左合葬)’이라는 글귀로 시작된 왕의 지석과 왕비의 지석이 나온 것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무령왕 이름이 사마이니 무대왕(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사마왕은 곧 무령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발견된 무령왕의 묘지석은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과 사망, 매장 시점 그리고 무덤에 쓸 토지를 매입했다는 것을 기록한 매지권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왕이 땅을 샀다는 매지권과 함께 그에 대한 대가인 돈도 이 무덤에서 발견되었다는 게 흥미로운데요. 발견된 돈은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만든 돈인 오수전입니다. 그런데 돈을 땅주인에게 주고 샀다면 돈은 무덤 안에 있다는 게 말이 안 될 수 있잖아요. 이 토지를 토지신에게 매입했기 때문에 무덤 안에 돈이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왕이 찬 것으로 보이는 길이 1m 가량의 칼과 20cm 길이의 은색요대 등이, 서쪽에 놓인 왕비의 관 주위에는 순금고리 2점 ,순금팔찌 3점, 구슬목걸이 1점 등 모두 80여 종 5000여 점의 국보급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무덤방은 남북이 4m, 폭이 3m로 입구지석 뒤에 돌사자 1개가 서 있고 동서에 목조왕관과 왕비관이 놓여있었습니다. 벽화는 없었고 내부 전면에 연꽃무늬모양이 벽돌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특히 이 왕릉은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것인데요. 왕릉에서 지석이 나온 것은 이 무덤이 처음이었고 발굴에 참여한 사람은 “해방 후 최대의 발견이다.”라며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구조물이 중국 남조의 것과 비슷해 보인다며 중국과 백제의 문화교류를 입증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석에는 백제 26대 성왕이 이 왕릉을 만들었다고 쓰여 있으며 따라서 이 무덤의 주인은 무령왕, 삼국시대 왕릉에서 지석이 나오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1442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릉, 백제의 다른 무덤과는 주인도 명확하고 많은 유물을 쏟아냈습니다. 도굴을 피한 결과이지요. 어떻게 도굴을 당하지 않았을까요. 일제 시대 때 조선총독부는 송산리 고분군을 조사했는데 그것이 1927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이전에도 수 차례 도굴을 당했다고 합니다. 1932년에는 5,7,8호분이 발견되고 33년에도 조사에 나섰는데 6호분 조사를 하면서 뒤쪽에 봉분이 있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봉분을 무덤 뒤쪽에 인위적으로 쌓은 구릉으로 판단해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오판으로 그동안 도굴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


하지만 문제는 다음이었습니다. 1971년 당시 우리나라는 왕릉급 발굴조사를 수행할 역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주민, 기자들을 포함한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발굴단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빨리 조사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철야 작업을 하게 됩니다. 신문 기자들의 취재를 뿌리치지 못하고 한 신문사마다 2분씩 무덤 안의 모습을 찍을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어떤 기자는 귀중한 문화재인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날이 어두워지니 발전기를 돌려가며 작업을 했고 다음날 오전에 작업이 끝났습니다. 몇 달, 몇 년에 걸쳐 진행해야 할 발굴 작업이 순식간에 끝난 것입니다. 박물관으로 옮기기 위해 삽으로 퍼다시피 했다는데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후 발굴팀에서는 금제유물을 수습하여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가져갔는데 박정희대통령이 왕비 팔찌를 들고서는 순금인지 궁금해 하며 손으로 휘어보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속전속결로 끝마친 발굴과정을 반성하고 거울삼아 2년 뒤 천마총 발굴부터는 외부와 격리한 채 작업을 하기로 했답니다. 
이 무덤은 여러 가지 사실을 말해줍니다. 일단 왕과 왕비가 죽으면 바로 무덤에 안치하는 것이 아니라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했다가 정식 왕릉으로 옮겼습니다. 왕의 지석에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 왕릉에 묻혔다.’고 기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토지신에게 묫자리를 돈으로 주고 샀는데요. 여기서 사용된 돈이 오수전이므로 당시 백제는 중국과 활발한 교역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진묘수를 조각하여 넣은 것입니다. 진묘수는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로 중국 후한대부터 나타나는 상징물이라고 합니다. 백제의 진묘수는 머리의 뿔은 철로, 몸은 돌로 만들어져 하나의 재질로 만들어진 중국의 것과는 달랐으며 입술 그리고 몸의 일부를 붉게 칠해 나쁜 기운을 막으려 한 것도 중국의 것과 다르다고 합니다. 진묘수는 도굴꾼뿐만 아니라 귀신을 막는 역할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왕과 왕비를 모신 관은 금송이라는 나무로 짰는데 이 나무는 일본 규슈지방에서만 생산되는 것으로 습기에 강하고 단단하여 관의 용도로 쓰이는 것 중 최고의 재료라고 합니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중 왕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적혀 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천황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없애기 위해 그 증거를 없애기로 하고 백제의 고분을 도굴하기도 했는데 송산리 고분이 벽돌무덤임을 알자 왕릉이 아니라고 생각, 발굴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손에 의해 발굴된 묘지석에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 뒤에 문장을 부면 ‘崩’이란 글자를 사용했는데요. 이것은 천자나 천자급에 준하는 사람에게 쓰는 글자로 이것은 한중일에서 전통으로 내려오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역사서 『일본서기』에서 천황의 죽음에 대해 붕어라 기록하면서 백제왕의 즉위, 사망연도를 기록하며 무령왕도 훙거란 표현을 썼습니다. 일본에서는 일왕은 서거가 아닌 붕어라 표현했으며 왕족과 종 3품 이상의 공경에게는 훙거란 표현을 썼고 따라서 훙거란 표현을 쓴 무령왕은 일본의 속국인 백제의 왕이기 때문에 일본서기에 훙거라 표현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묘지석의 문장은 백제가 당시 스스로 천자국이라 불렀다는 증거가 되었으며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기에 백제왕들의 즉위년도와 사망년도를 기록했다는 일본측의 주장을 뒤집고 편찬자도 누구인지 알 길 없는 『일본서기』에 대한 의구심만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무덤의 주인인 백제 무령왕은 어떤 업적을 남겼을까요. 그는 동성왕의 뒤를 이어 501년에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 서기에는 문주왕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과는 이복형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것은 당시 그의 나이 40세로 백제 25대왕인 것입니다. 안으로는 반란을 진압하였고 제도 정비에 힘을 썼으며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부여씨 왕족을 보내고 통치하도록 해 정치 안정을 이뤘습니다. 그리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구제정치를 실시했으며 농사를 권장하는 민생안정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가야를 쳐 승리를 거두었는데요. 당시 백제는 신라, 가야 등 9개 나라를 소국이라 칭할 정도로 대국의 면모를 과시했으며 남조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는 고구려를 여러 번 격파해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며 ‘누파구려 갱위강국’이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들 성왕은 아버지에게 ‘무령’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이는 무력으로 주변을 평안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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