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 창건한 무왕의 왕비는 누구인가

2022. 7. 6. 16:4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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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사리 봉안기

백제 무왕은 제 30대 국왕으로 최초의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백제는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내주고 관산성 전투에서 패한 적이 있었고 이에 따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제 무왕 시기에는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하였습니다. 집권 초기인 무왕 3년인 602년에는 아막산선을 공격하니 그것이 바로 아막산성 전투입니다. 당시 백제의 평상시의 병력은 6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잃은 병력은 4만이었으니 백제 입장에서는 타격이 큰 전투였습니다. 하지만 무왕은 이로 인한 혼란을 권력 강화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는 왕궁평성의 운영이고 다른 하나는 미륵사를 창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미륵이라는 무엇일까. 미륵은 본래 석가모니불의 친구라는 ’미트라‘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미륵은 석가모니 이후 무려 56억 7000만 년이 되면 이 땅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부처가 되어 남아 있는 중생들을 구제해 준다고 하는 미래부처입니다. 그리하여 혼란하던 시기였던 당대 삼국시대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궁예가 자신을 스스로 미륵이라고 했잖아요. 그보다 훨씬 앞선 무왕은 미륵사를 세우는데 그가 미륵사를 세운 것은 나라 안을 평안을 도모하는데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미륵사의 창건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합니다.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현재로는 미륵산 밑에 큰 연못가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여기에 큰 절을 짓자고 건의하니 이를 왕이 수락합니다. 그리하여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지명법사는 신통한 능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럼 지명법사는 누구일까요. 바로 서동요에 등장하는 승려로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마캐는 소년이었을 때 신라의 진평왕에게 사위로 인정받기 위해 수많은 황금들을 신라의 궁궐로 보냈는데 그 때 이 금들을 보낸 이가 바로 지명법사였습니다. 이 지명법사가 다시 한 번 능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과 탑과 낭무를 세 곳에 세우고 절을 세우니 그 절이 바로 미륵사입니다. 
 미륵사의 배치는 동, 서로 석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탑 뒤에는 부처를 모시는 금당이 각각 자리합니다. 이것이 복도(회랑)로 구분되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습니다.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은 바닥마루의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서쪽 금당 앞의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지정됐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목조 건축의 기법을 사용한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인입니다.
이 미륵사지석탑은 미륵사를 이곳이 미륵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유물입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높이 14.24m, 기단부 지대석이 9.22m규모로 현재는 6층의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 탑은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한국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식은 목탑이지만 석재로 건축하여 그 느낌을 알 수 있는 탑입니다. 하지만 이 탑은 훼손이 심하다고 합니다. 탑의 훼손된 부분을 일본인들이 1910년대에 시멘트를 발라놓았습니다. 하지만 시멘트 곳곳의 표면이 부서지고 비가 오면 물이 샜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륵사지 석탑이 세워져 있던 미륵사는 고려 시대에도 그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16세기 쯤 폐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륵사 주변 마을에는 폐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는데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시대에 사찰의 민폐가 커서 주민들이 산신령에게 물어보니 미륵사 터의 풍수상 형국이 쥐의 형국이니 앞에 고양이 무덤을 만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했더니 절이 기울기 시작해 폐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백제 미륵사는 무왕이 선화공주의 청을 받아 창건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것은 『삼국유사』에 근거한 것입니다. 2009년 미륵사지 석탑 해제복원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창건한 사람에 대한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사택지적비

기록된 문장에서는 창건한 사람을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 기록하고 있는데요. 사택이라는 성씨가 백제에 있었고 의자왕 때에는 사택지적이라는 사람이 대좌평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 문장만 보면 미륵사를 창건한 사람은 신라의 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의 딸이자 무왕의 부인이 됩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설화로서만 이해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사실 삼국이 치열하게 다툼을 하던 와중에 백제의 왕과 신라의 사돈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삼국유사의 기록은 정말 잘못된 것일까. 삼국유사는 서동이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만났고 백제 무왕의 왕비가 미륵사를 베풀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삼국유사의 그 어떤 기록에도 선화공주가 창건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후대의 학자들이 그저 이 두 이야기를 서로 꿰맞추었기 때문에 선화공주가 창건했다라는 사실이 도출된 것일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기존의 알고 있던 미륵사의 창건 동기는 혼돈에 빠지게 되었고 이에 더해 무왕이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이후 사태적택의 딸을 왕비로 들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습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그리고 여기서 눈여겨 불만한 대목은 대왕폐하라는 대목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백제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황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백제 무왕은 황제체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이 구절에서는 미륵사를 창건한 사택왕후에 대하여 고귀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무왕 집권 후기에 익산에 근거한 사택 가문이 사택왕후를 등에 업고 큰 권세를 누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후 의자왕이 왕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가 태자로 책봉된 것은 무왕 33년, 632년이었습니다. 그는 맏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왕 33년에야 태자로 책봉된 것은 그가 적자가 아닌 후궁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는 선화공주의 아들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추측할 있는 것은 바로 사택지적비의 발견입니다. 이는 좌평(大左平)의 고위직을 역임한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말년에 늙어 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불당과 탑을 건립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당탑비라고 합니다. 의자왕은 집권초기 그 힘을 다지기 위해 반대파 귀족을 섬으로 축출했고 그 중에 사택지적도 연루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정에서 백제의 사신인 대좌평(大佐平) 지적(智積) 등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일본서기-
 그 때가 642년 쯤으로 보고 있으며 이후 왜에서 돌아온 사택지적은 654년에 사택지적비를 세운 것이죠. 이를 보면 의자왕의 어머니는 바로 삼국유사에서 선화공주로 표현되는 인물이며 백제의 미륵사를 창건한 사택왕후는 당시 유력가문의 딸로 선화공주와 일치성은 더욱 희미해지게 됩니다. 또한 의자왕 초기 왜로 축출되었던 세력이 이전의 무왕집권시기에는 최고 권력을 누리며 미륵사를 창건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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