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전투에 왜가 지원한 이유는...
2022. 11. 7. 07:4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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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 의자왕이 항복하고 의자왕과 신료 93명, 그리고 백성 12000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그렇게 역사에서는 백제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지만 당시 백제의 지도부와 관료들은 이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백제 장수 복신(무왕의 조카)과 승려 도침이 주류성을 거점으로 저항했다.’ 『삼국사기』
백제 땅 각지에서 부흥운동 움직임이 있었고 그 중심에는 백제 왕족인 복신과 승려 도침, 그리고 흑치상지 장군이 있었습니다. 복신과 승려 도침이 중심이 된 백제부흥군은 사비성을 공격하여 곧 회복하였고 복신은 사신을 통하여 당시 왜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을 보내주도록 왜에 요청합니다. 그리고 부여 풍은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임존성에서는 흑치상지의 지휘 아래 나당연합군을 물리치니 백제 200여 개 성이 이에 호응하였습니다. 당시 백제 부흥운동의 기세가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세에 당나라가 40만 대군을 보내어 반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가 이렇게 대군을 보낸 것은 백제와 일본과의 연합을 우려했기 때문이고 생각대로 왜에서도 지원군을 보냈습니다.
‘부여 풍이 수하 장수를 죽인 것을 안 신라가 곧바로 주류성을 빼앗으려고 했고, 이에 27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 신라를 치게 했다.’ 『일본서기』
백강전투가 있기 전 백제부흥운동 지도부에서는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복신과 부여 풍이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으므로 복신은 병을 핑계로 풍이 왔을 때 처리하려했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해 복신이 제거당했습니다. 이후 왜가 지원병을 보내왔습니다.
‘신라가 왜군과 맞닥뜨려 4번 모두 이기고 배 400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띠었다.’ 『삼국사기』
오늘날의 동진강으로 추정되는 백강에서 백제와 일본 수군 400척은 당나라 170척에 비해 숫적 우세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물이 빠지는 물때를 잘못 알아 갯벌에 갇혀 대형참사가 터졌습니다. 이렇게 백강전투에서 승리한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공격했고 풍왕이 도망친 주류성은 쉽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백제 부흥운동은 사실상 끝이 난 것입니다. 당시 백제부흥군의 규모는 50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왜는 그의 몇 배에 달하는 2만 7000~4만 2000명의 지원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백제는 이미 660년, 3년 전에 당나라에 항복한 바 있었습니다. 물론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긴 했지만 망한 국가를 위해 이렇게 대규모의 지원병을 보낸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명기 3년 (631)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을 보내 질로 삼았다.’ 『일본서기』
‘일찍이 왜에 질로 가있던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여기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은 부여 풍이 인질로 일본으로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백제가 왜에 트집잡힐 일이 있어서 왕자를 인질로 보냈을까. 그런데 왜에 인질로 가 있던 백제의 왕자는 풍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397년에는 전지, 461년에는 곤지, 505년에는 사아군, 555년에 혜, 559년에는 아좌, 그리고 631년에는 위의 기록처럼 왜에 건너가 30년 동안 있었습니다. 이들은 태자이거나 왕자 신분이었고 곤지 같은 경우는 왕의 동생이었습니다. 일본의 학자들 일부는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도 대규모 병력을 백강전투을 투입한 이유에 대해서 백제가 왜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부여풍이 백제로 귀국할 때 왜는 군사 5천을 보내어 수행하도록 합니다. 이것은 부여풍은 왜에 가 있던 인질이라기보다는 일본에서는 높이 대접해야할 귀빈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부여 풍은 백제와 왜의 긴밀한 관계유지를 위한 사절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 백제는 왜에 문화를 전달해주는 나라였고 일본에서는 선진문물을 백제로부터 받아들이는 기회를 갖는 대신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도 대규모 병력을 백강전투에 투입한 것은 그동안 유지해온 친밀한 외교관계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멸망한 나라에 대한 군사적 지원은 설명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2001년 12월 18일 있었던 아키히토 당시 일왕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당시 2002 월드컵을 앞두고 일왕이 가지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는데 그의 대답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점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과연 백제와 왜의 관계는 일왕의 먼 조상이 한반도에서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백강전투에서 왜의 군사적 지원이 이해안가는 바는 아닙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고대 일본의 씨족에 대해 조사한 바 있는데 이들 중 26%가 한국계라고 합니다. 『신찬성씨록』은 고대 일본의 왕경과 그 주변지역에 거주하는 1182씨의 씨족지를 집성한 것으로 8세기 말 헤이안 시대를 연 환무 천황의 칙명으로 시작돼 81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고대 일본 씨족들의 본관, 사적, 조상의 유래 등 실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쓰이는데 특히 한국계 313씨의 씨족 가운데에서 백제계가 202씨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한국계 씨족 중에서 특징적인 것은 백제 무령왕 후손인 화조신(和朝臣)으로. 이 씨족은 '신찬성씨록' 편찬을 시작한 환무 천황의 외척이며 당시 도래계(외국계) 씨족의 최고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마 고대 사회에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일본정치계에 큰 힘을 발휘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고대 일본의 귀족으로 소가씨(蘇我氏)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소가씨는 천황의 교체에 관여할만큼 정치적 힘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00년간 일본의 실권을 장악한 소가씨의 시조는 백제 장군 목라근자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가씨는 원래 임씨이며 임씨는 백제국 사람인 목귀공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목씨에서 임씨로 성을 바꾸었다는 것으로 따라서 목협만치란 인물이 백제에서 태어난 일본으로 건너가 성을 소가씨로 바꾸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협만치는 일본의 나라 현 가시하라 시 소가정으로 지명을 바탕으로 호족의 성을 정하니 그리하여 소가씨라고 불려진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목협만치가 문주왕과 함께 웅진천도를 주도한 인물로 그는 목라근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백제와 왜를 오가며 백제의 문화를 전달해주며 왜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목협만치는 왜의 정치에 깊숙이 관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목만치가 일본에 정착한 것으로 생각하니 그것은 목만치가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이후 소가노 만치가 일본역사서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당시 백제부흥군에 파병한 일본천왕은 누구일까. 그는 38대 텐지 천왕으로 그의 아버지 34대 천왕 죠메이는 백제궁을 지었고 그 뒤를 이은 죠메이 천왕의 부인이자 지원군 파병을 준비한 사이메이는 37대 천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죠메이 천왕의 친백제 성향이 부인과 아들에게까지 이어져 백강전투에 지원병력을 보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6세기 후반 신라, 고구려와 중국을 통한 문물수입이 중요해지자 백제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는데 여전히 친백제적인 성향을 버리지 않았던 소가씨가 타도되고 당과 신라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다이카개신이 추진되었습니다. 다이카 개신(645)의 주역들은 당시 코우교쿠를 폐위시키고 코우토쿠를 천황자리에 앉히고 나카노오에가 황태자가 되었는데 이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나카노오에가 수도를 아스카로 옮길 것을 건의했지만 일황은 거절했고 따라서 코우토쿠 천왕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카노오에는 친백제세력과 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나카노오에의 승리로 끝났고 나카노오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천황으로 받드니 그가 바로 사이메이 천황이고 뒤 이에 나카노오에가 천황에 오르기 되니 그가 바로 백강전투에 파병을 텐지 천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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