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류는 백제류

2022. 11. 29. 07:5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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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아스카시대를 대표하는 걸작 불상으로 ‘백제관음상’이 있습니다. 일본 나라 호류지에 있는 이 불상은 높이 210㎝, 팔등신 늘씬한 몸매, 정병을 살포시 쥔 왼손, 앞으로 내민 오른손의 굴곡까지 유려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름은 허공장보살이라고 하는데 ‘백제관음’이라 불리게 된 건 불과 100년밖에 안되었다고 합니다. 이 불상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은데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며 1698년의 기록에는 인도에서 만들어져 백제를 통해 건너왔다고 합니다. 이 불상은 1911년 호류지 창고에서 발견되었는데 당시 일본학자들은 이 불상을 조선양식으로 보았고 1919년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1889~1960)가 쓴 『고사순례』에 '우리 백제관음상'이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이름 때문인지 백제에서 건너갔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불상의 재료가 일단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 않는 일본산 녹나무로 밝혀졌습니다. 일본에서 좋은 나무를 들여와 이것을 백제장인이 만들어 일본으로 다시 보내거나 백제장인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 역시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왜 불상에 이름에 백제라는 단어가 붙은 것일까. 
사실 백제란 나라를 이해하는 데 있어 주목할 것은 바로 그들의 활발한 대외활동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일본입니다. 당시 백제는 발달된 항해술과 조선술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의 고대국가형성기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백제는 근초고왕(4세기)때에는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 등을 전해 주었으며 성왕(6세기)시절에는 5경 박사(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 등 경서에 능통한 자에게 주는 관직)가 유학을 전했으며 노리사치계가 불교를, 왕보손이 천문학, 역법을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위덕왕(6세기)때는 4명의 음악인들이 건너갔으며 불교서적과 율사, 선사, 조불사, 조사공 등이 대규모로 건너가 소가씨가 후원하여 만든 불교사찰 ‘아스카지’를 건설하는 데에 힘을 보탰습니다. 또한 무왕(7세기)때는 승려 관륵이 역서와 천문, 지리, 둔갑, 방술에 관한 책을 전해 주고 역박사 왕도량, 의박사 왕유릉타, 채약사 반량풍, 정유타 등은 일본의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당시의 문화흐름은 중국에서 한반도로 그리고 일본열도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는 미륵

일본의 국보 1호는 광륭사 영보전에 있는목조미륵반가사유상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닮아 있으며 일본의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소재는 한반도에서 자라는 적송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이 국보 1호 옆에는 백제에서 전래된 유물이 있으니 그것은 우는 미륵이라 불리는 백제 전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불상은 백제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쇼토쿠 태자가 미륵신앙을 백제에서 들여오면서 이 불상도 같이 들여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일본에는 백제의 흔적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름 역시 아직도 전하고 있는데 교토 시가현 애이지군에는 백제사라는 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절은 백제승려 도흔이 590년에 창건한 사찰입니다. 절이 창건한 뒤에는 이 지역에 정착한 백제인들이 백제의 재건과 안녕을 기원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가현 요우카이치시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 있는데 바로 이시오우지 3층석탑으로 669년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백제탑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또다른 국보급 문화재에도 백제인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본 나라 시에 있는 동대사 대불은 752년 성무천황의 지시로 완성된 세계 최대규모의 금동노사나불상입니다. 747년에 주조가 시작되었는데 이 불상제작에 필요한 황금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749년에 지금의 아오모리를 다스리고 있던 백제왕 경복이란 인물이 백제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와쿠야라는 곳에서 금광을 일본 최초로 개발하여 황금 900냥을 바쳤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금광기술이 없었는데 백제왕경복 덕분에 대불제작이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금빛이 사라졌지만 이 불상을 만들기 위해 500톤의 구리와 황금 900냥(13.6㎏)으로 사용한 것으로 백제왕 경복의 공이 컸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크게 기뻐한 성무천황은 연호를 천평(天平)에서 천평감보(天平感寶)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사루하시 다리

백제가 전한 기술에는 뛰어난 건축 토목기술도 있습니다. 일본에는 사루하시라고 하는 아름다운 다리가 있으며 지금의 다리는 1984년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은 것입니다. 이 다리는 원숭이다리라 불리는데 원숭이가 서로의 등을 타고 건너는 모습을 보고 지은 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명성과 이야기를 가진 사루하시는 백제인 시라코가 축조한 다리로  교각을 쓰지 않고 하네기(跳木)라는 구조로 양쪽을 연결한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이 다리는 백제인들의 빼어난 토목 및 교량기술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현 텐리시에는 6세기 초반의 무덤이 있는데 여기서 조족무늬토기가 나왔습니다. 조족무늬토기는 한반도 특유의 무늬로 백제에서 발견된 토기이고 3~4세기에 백제에서 나온 것이 6세기 일본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사카에 있는 다카이다야마 고분은 백제의 영향을 받은 횡혈식 무덤인데  여기서 백제관련유물이 나왔습니다. 바로 청동거울과 울두(청동다리미)가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왕족이나 지배층계층에서만 나오는 유물들인데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울두는 무령왕릉에서 나온 것과 동일한 양식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백제인의 토기와 무덤이 나왔다는 것은 일본이 고대국가형성을 하던 시기에 수많은 백제인들이 건너와 터전을 일구며 살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선진문물 역시 일본에 이식시킨 것입니다. 

일본동대사대불

그럼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인들은 백제식으로 집을 짓고 살지 않았을까. 그러면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일본 나라현의 가시하라시 유적에는 6~7세기 고대 일본의 보통 주거 형태와는 다른 모양의 집터가 나왔습니다. 사각형으로 도랑을 파고 그 도랑에 크고 작은 구멍을 뚫어 기둥을 세운 형태의 집으로 일본에서 찾을 수 없었던 이 집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에서 발견된 집터와 같았습니다. 이른바 대벽건물로 한반도에서도 백제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벽건물은 대체로 마을의 중심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 건물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기에는 온돌시설도 있었고 부뚜막과 시루도 같이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의복생활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스카의 작은 신사에는 옷의 신을 모시고 있는데 이 신은 백제에서 건너온 부부입니다. 그럼 이 백제인들이 옷과 관련된 기술을 전해주었다고 하면 그 전에는 일본인은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었을까. 
‘천을 그대로 몸에 둘러 걸친 가사의와 천에 구멍을 내 목을 끼워넣는 관두의를 입었다.’
이와 관련한 일본의 고대복식은 중국의 박물관에 있는 「양직공도」에서 그림을 통해 그 모습을 전하고 있는데 일본사신은 천을 허리에 두르고 끈을 묶었으며 신발은 아예 신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에 보내는 사신이므로 최대한 차려입고 보냈을 텐데 고대 일본이 백제인에 비해 다소 초라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일본의 복식문화에 백제인이 들어와 혁명을 일으켰으니 아마 신으로까지 추앙받은 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본 나라 호류지의 백제관음

오사카에는 사야마이케라는 거대한 저수지가 있는데  616년에 쌓은 것으로 이 저수지에 사용된 것은 부엽공법이었습니다. 부엽공법이란 흙으로 된 제방이나 성벽 등을 연약한 지반을 단단히 쌓기 위해 흙 사이에 풀이나 잎이 달린 나뭇가지를 깔아 흙이 단단히 붙도록 하는 고대의 제방 축조 공법인데 이 제방의 축조가 백제계 기술자들의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90년대 중반 풍납토성 성벽의 조사에서 부엽공법이 확인된 것입니다. 
일본에는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라는 말이 있는데 직역하면 '백제에 없다'가 되는데, 이 말뜻은 '시시하다'라고 합니다. 즉, 백제 것은 좋다는 이미지가 일본 고대시기에 생긴 것입니다. 즉, 처음에서 ‘백제관음상’이라 부르게 된 건 뛰어난 작품을 보고 마치 백제의 것과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아마 지금의 한류 이전에 고대에 백제류가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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