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창왕명 사리감 그리고 위덕왕
2022. 12. 8. 08:0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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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었던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로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특히 지난 2007년에는 이곳에서 의미 있는 발견이 있었습니다. 왕흥사 목탑 터에서 황금사리병이 발굴되었는데 청동 사리함의 몸체에는 '정유년이월십오일백제왕창(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이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정유년은 창왕의 재위 기간 중인 577년이었습니다. 따라서 발견된 황금사리병은 현재까지 출토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도된 것이며 백제사리병으로 온전하게 발굴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발굴 당시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봉안됐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에 담긴 채로 출토되었습니다. 청동사리함은 목탑의 기둥을 세우는 장치인 심초석 하단에 마련된 사리안치용 석제의 한쪽 끝에 뚫린 사리공에 봉안돼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5자 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이 기록을 통해 기존에 『삼국사기』의 기록인 법왕 2년인 600년에 축조되고 634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려진 왕흥사의 축조연대가 실제로는 위덕왕 24년인 577년이라는 사실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이외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학계에서는 백제금동향로 이래 최고의 성과라고 보았는데 "금, 은, 동의 형태로 중첩된 완전한 사리장치가 발견됐다는 점, 지금까지 알려진 바 없는 독특한 사리장치의 안치방식, 사리봉안 기록이 함께 발견된 점 등을 그 이유로 꼽았습니다. 140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백제 황금사리병은 기존의 알고 있던 역사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리함의 형태는 심초석 밑에 하나의 석제를 깔고 사리함을 안치하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백제만의 독특한 양식도 있었습니다. 심초석 밑에 전실 등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사리장치를 하는 중국의 양식과 다르게 심초석 밑에 또 하나의 석제를 깔아 사리장치를 안치하면서도 심초석이 받는 하중을 나누어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리함 몸체에는 '사리이매장시 신화위삼(舍利李枚葬時 神化爲三. 사리 두 매를 묻었으나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는 글귀를 넣었으니 이는 사리를 안치할 때 적는 신기한 이야기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런 명문해석에서는 다른 시각도 있는데 '刹'(찰)은 사찰(寺刹)이란 뜻이 아니라 목탑의 기둥으로 해석, '입찰'(立刹)이라는 문구를 '사찰을 건립했다'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백제의 창, 위덕왕은 죽은 왕자를 위해 입찰한 날짜가 바로 정유년 2월 15일이 됩니다. 그런데 이 2월 5일은 불교계에서는 대단한 축제일이었다고 합니다. 현대에는 석가탄신일이라고 하면 4월 초파일을 떠올리지만 그렇게 결정된 것은 오래된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양(梁)나라(502-557) 때 종름이란 사람이 완성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라는 문헌에 의하면, "2월8일은 석가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날이다"(二月八日, 釋氏下生之日)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형초세시기』라는 책에서는 4월 초파일에 대해서는 각 사찰에 봉안한 부처님을 다섯 가지 향기가 나는 향수로 목욕을 시키는 욕불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으로 『삼국유사』에서도 ‘신라의 풍속에 2월이 되면 초파일에서 15일까지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의 전탑을 도는 복회를 행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찰(刹)이란 글자는 사찰이 아니라 탑의 일부분인 찰주를 지칭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흥사 백제 창왕 명 사리함에서 말하는 입찰(入刹)이란 말은 목탑 중심인 기둥을 세웠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을 파고 묻는다.‘라고 해독한 부분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단순히 매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 희생물을 땅에다가 묻는 일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사리 장치 주위에 있던 진단구에서는 8천 여개의 구슬과 함께 다양한 유물이 나왔고 그 중에는 상평오수전이 있었습니다. 창왕 이전에는 중국의 남조와 주로 교류하엿는데 창왕 대에는 북조의 여러 나라와 교류했고 북조에서 사용한 오수전의 발견은 당시 백제와 북조의 활발한 외교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 아들을 먼저 보내야 했던 창왕은 어떤 사람일까. 그의 치적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태자 시절 그는 신라원정에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태자의 신분으로 여창은 신라를 정벌하고자 했습니다.
“(태자인) 여창(餘昌)이 신라 정벌을 계획했다. 그러자 원로대신이 ‘하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화가 미칠 게 두렵습니다’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여창은 ‘늙으셨네요. 어찌 겁을 내시오’하고 출전을 고집했다.”(<일본서기>)
하지만 태자는 되려 관산성에서 포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그를 구하러 온 것이 아버지 성왕, 하지만 이 전투에서 성왕의 목이 잘리고 최고관등인 좌평 4명과 사졸 2만9600명이 등이 희생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태자는 여기서 탈출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창왕입니다. 이 패배는 그에게 죄책감을 안겼고 차라리 출가해서 승려로 살겠다고 할 정도로 참담했습니다. 하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위덕왕이 된 그는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절을 세우고 죽은 아들을 달래고자 했는데 그 때 세운 절이 왕흥사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록 관산성의 비극으로 어쩔 수 없이 이른 시기에 왕위에 올랐으나 554년부터 598년까지 무려 44년 5개월 동안 왕위에 있으니 이는 백제왕들 중에서 최장기간 기록입니다. 어쩌면 관산성의 비극이 위덕왕을 신중론자이자 평화주의자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뚜렷한 업적을 세우지 않았으나 신라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시에도 큰 위기 없이 다라를 다스렸습니다. 그의 치적이라면 중국 남조왕조인 진(陳, 557〜589)뿐만 아니라 북조왕조인 북제, 북주, 그리고 이어 중국을 통일한 수(隋, 581〜618)와의 교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도 위덕왕의 공이라면 공이겠습니다. 그리고 위덕왕이 성왕피살을 보복하기 위해 왜에도 아우 혜를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으니 아마도 관산성 전투패배에 대한 부담은 생각보다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지난 1995년 19월에는 능산리 고분군 폐사지에서 또 하나의 유물이 나왔습니다. 가로 세로 너비 50㎝ 크기의 화강암으로 된 아치형 돌덩이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이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볼 수 없었던 이 특이한 유물에는 ‘백제 창왕 13년 태세재 정해 매형공주 공양사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백제 창왕 13년인 567년에 매형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으로 해당 유물이 발견된 곳은 창왕의 누이인 매형공주가 신라군에게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 성왕의 영혼을 달래고 위업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찰이 자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리감 속에 사리는 없었습니다. 아마 도난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그것은 백제 멸망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물이 발견된 곳에서 불과 30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공방터 나무물통에서는 금동대향로가 출토되었습니다. 아마 백제가 멸망하면서 이 곳의 스님들이 급하게 이 향로를 묻고는 떠난 것으로 보이며 아마 그 과정에서 사리가 도난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한편 2001년에는 이곳에서 목간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는 ‘보희사’, ‘자기사’라는 글자가 확인되어 이 폐사지의 이름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보였으나 아마 이는 외부의 절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창왕의 누이인 매형공주가 사리를 안치하면서 성왕을 추모하면서 당시 왕위에 있던 위덕왕의 안위를 걱정했고 그런 위덕왕이 다스리는 백제가 편안하기를 기원하면서 사리를 안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헤왕과 법왕은 즉위 1년 만에 서거하면서 백제의 중흥은 지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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