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에 백제가 있었을까

2023. 7. 30. 07:3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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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고분군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갈라져나온 나라입니다. 그리고 3세기 후반에 쓰여진 『삼국지』「동이전」에는 마한 54개국 중에 ‘백제국’이 있는데요. 만주에서 내려온 세력이 마한연맹의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마한의 맹주는 목지국이었습니다. 그러면 마한연맹의 백제는 목지국보다 약한 세력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했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자치통감』
기원후 346년의 일을 기록한 글입니다. 여기서 부여의 발상지인 녹산은 송화강 유역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여러모로 기록과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식을 대입해 보았을 때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고구려보다 더 북쪽에 있는 송화강의 부여국을 어떻게 백제가 공격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를 정인보 등은 4세기 초에 있어서 백제의 해상발전을 요서 진출의 한 근거로 보았으나 송화강 유역은 만주 내륙입니다. 백제가 해상으로 진출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사서에서는 백제가 부여를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 셈입니다.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송서』
‘가을에 궁이 드디어 마한(백제)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했다.’ 『후한서』
사실 위 기록들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와는 다릅니다.  중국 만주 땅에 백제라는 또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는 대륙 혹은 만주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년,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라는 글이 있으므로 이는 『삼국사기』도 백제가 만주국이 있었다는 것을 살짝 보여준 셈인데요. 사실 고구려와 백제가 붙어있고 그 길을 통해 백제의 주민들이 고구려로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강의 주민들이 그곳을 버리고 중국 군현지역을 통과한다는 것도 쉽게 납득하기 힙듭니다. 사실 이러한 기록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지만 그냥 그렇다고 지나치기에도 미심쩍습니다. 여기에 기록이 더 있는데요. 
‘건광 원년(121년) …가을에 궁이 드디어 마한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하였다,’ 『후한서』
‘연광 원년(122) 봄 2월 왕이 아들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현도를 구하였다. 고구려, 마한, 예맥을 격파하자 드디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보내었다.’ 『후한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때에는 바다를 건너 요서ㆍ산동ㆍ강소ㆍ절강 등지를 경략하고 왜에까지 이르렀다는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주장하였는데, 근구수왕에 이르러 백제가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백제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래도 눈의 띄는 국가가 있으니 바로 마한입니다. 고구려와 예맥은 그렇다치더라도 마한 역시 이들과 군사활동을 했다는 것은 백제보다 더더욱 생각하기 힘든데요. 사실 마한이란 나라가 만주에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백제가 마한연맹 중 하나였으므로 백제가 단독으로 다른 마한 연맹체와 협력 없이 군사활동을 한다는 것이 무리라고 하여 사관이 마한이라고 표기할 수 있습니다.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 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양서』 629, 639년
이 기록에서는 마한이 54국으로 된 나라이고 그 중에 백제란 나라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란 나라가 요동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요. 이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혹시 2개의 백제가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요. 백제가 부여에서 기원하였다면 이들 중 일부가 한반도남부로 내려가 마한의 연맹을 구성하여 그 일원이 되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소개한 346년의 『자치통감』의 기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당시 중국은 혼란에 빠진 시기였습니다. 5호16국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고구려도 서쪽변방을 튼튼히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잔,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신민이었다.’ 「광개토대왕비문」
「광개토대왕비문」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지라 그 과정에서 과장도 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 재위 이전부터 백제가 고구려에 예속된 관계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요. 다만 만주에 있던 백제가 고구려에 신속된 관계였고 고구려가 서쪽변방에 신경을 쓸 동안 백제는 그와 같은 관계를 벗어나고자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북방에서 전연과 백제가 국경을 맞댈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두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는 그 존재를 중국에 사서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및 우문, 단부의 사람은 모두 병세를 옮겼는데 중국의 의를 사모하여서 온 것 같지는 않으니 모두들 돌아갈 생각이 마음에 있습니다. 지금 호(戶)가 10만이나 좁은 도성에 모여들고 있어서 장차 국가에 큰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 종족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고 법으로 단속하면 됩니다.’ 『진서』 「모용황재기」
당시 백제는 전연과 교전을 벌일 정도로 만주에서도 그 힘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전연이 요서 지방의 단부를 멸망시킨 것은 336년이고 342년에는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을 공략하고 343년에는 우문부를 멸망시켰으니 그 즈음에 있던 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광서장족자치구 옹정현 지방세무국 백제세무국

백제는 전연에 타격을 맛보고 이후에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만주에서 그 힘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일로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지 않았겠느냐하는 것인데요. 백제가 남하하면서 고구려를 통과하는 일이 생기지만 고구려는 성을 중심으로 한 거점형태의 지배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백제의 남하가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때 남하한 세력이 비류계이고 본래 마한에 있던 세력이 온조계라면 이들의 건국설화에 어느 정도 맞추어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석촌동의 고분군입니다. 기단식 석실적석총은 가장 오래된 연대로 4세기 후반까지 보고 있는데요. 이러한 무덤이 나타난다는 것은 당시 왕실교체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만주에서 내려온 백제세력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 역사서인 『삼국사기』에는 백제 요서 경략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사학계에서는 고려 17대 인종 23년(1145)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찬술하며 고의로 누락시킨 것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유학자로 신라 왕실 후예였던 김부식이 사대주의적 사고로 백제를 비하한 결과라는 관점이라는 것인데요.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둘째 아들인 온조가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라는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 건국자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라 충분한 검증을 통해 진실을 밝혀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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