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책계왕 분서왕 비류왕

2023. 8. 2. 07:4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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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은 우리 장인의 나라이다. 그 요청을 돕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이것은 백제 책계왕과 관련된 기사입니다. 책계왕은 백제의 제9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8대 고이왕의 장남. 체구가 장대하고 의지가 굳세었다고 합니다. 백제 책계왕에게 있어 장인의 나라라고 했으니 대방 왕의 딸 보과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책계왕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군을 물리쳤습니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맞붙은 첫 번째 기록으로 책계왕의 대방군 구원 때문에 백제는 고구려와의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이전까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충돌이 없었는데 중국 한족(漢族)의 지배를 받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예맥-한인(韓人)의 혼합계열 국가인 백제와 예맥계 국가인 고구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D 286년 백제 9대 책계왕이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자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 『삼국사기 』 「백제본기」 (책계왕1년)
그리고 책계왕 시절에 위례성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백제 입장에서는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함이고 이는 대방을 지키는 목적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책계왕이 죽고 17년 후인 315년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국경을 맞대게 되자 양국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했으므로 백제가 대방을 구원한 것은 장인의 나라를 구하는 의리만으로 성사된 것은 아니며 고구려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백제와 대방이 혼인동맹을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대방을 공격한 군대가 고구려라 하는데 정작 같은 책 「고구려 본기」에는 고구려의 군대가 대방을 쳤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리고 286년 왕의 동생인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이 반역을 꾀하자 이를 처단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내부상황을 고려할 때 고구려가 군대를 실제로 대방에 보냈는지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당시 고구려군대가 대방에 들이닥쳤다면 주력군대가 따로 있었을 것이며 그곳에 고구려군이 합류했을 것입니다. 책계왕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였다고 하니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가 긴장된 상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삼국사기』

이 때 한나라군대는 낙랑으로 보고 있으며 맥인은 동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정부차원에서 백제와 싸운 것이 아닌 낙랑의 태수의 판단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요. 한편 대륙백제와 관련하여 이 때의 한나라의 군대를 흉노의 귀족인 유연의 세력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당시 중국의 삼국시대가 저물고 서진이 등장하여 혼란에 빠진 한사군이 다시금 그 힘을 내기 시작한 때로 그 과정에서 백제와의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전쟁에 나선 책계왕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데요. 다만 당시 서진이 직접 한군현의 부활을 도울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따라서 한나라의 군대를 유연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서진이 몰락하는 시점에서 백제와 유연 둘 다 팽창을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어 백제왕의 희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대륙백제와 연관지어야 하므로 무리수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의견입니다. 다만 책계왕은 가뜩이나 기록이 적은 백제의 군주들 중에서도 특히 기록이 적은 군주들 중 한명이므로 그가 대륙에 머무르며 전쟁을 치루었기 때문에 대륙백제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삼국사기』 저자들은 이 기록을 뼀다는 것이고 따라서 12년의 재위기간동안 『삼국사기』에 남은 기록은 고작5줄이라는 것입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것은 백제의 제10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9대 책계왕의 장남인 분서왕입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표(儀表)가 뛰어나 아버지인 책계왕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304년 2월 낙랑군(樂浪郡)의 서쪽 현(西縣)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는데 이것이 분서왕의 유일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6년이 조금 넘는 재위기간의 마지막기사는 이러합니다.
‘분서(汾西)왕 7년(304)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의 서현(西縣)을 습격해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자객에 의해 왕의 목숨을 빼앗기는 중대한 일에 대한 백제의 추후 조치는 전해지지 않는데요. 당시 분서왕의 자식들이 다 어렸고 분서왕에 이어 왕위에 오르는 비류왕 대에는 낙랑과 싸우는 기록이 없어  비류왕 배후설에 설득력이 생깁니다. 이러한 이해관계와 맞물려 한군현이 개입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황창랑은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 모르나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그가 8살 난 어린아이로서 신라 왕과 꾀하여 백제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백제 저잣거리에 가서 검춤을 추니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왕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라 하니 창랑이 그 자리에서 왕을 찔러 죽였다.” 한다.‘ 『속동문선』
황창랑(黃昌郞)이라는 이름의 신라 출신 소년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황창랑이란 인물에 대해 전해지는 것이 없거니와 애당초 백제 왕 중에 살해당했거나 정황상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왕들이 분서왕 말고도 너무 많습니다. 조선시대에 백제왕을 찔렀다는 황창랑, 하지만 이 인물이 분서왕을 제거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이로 인해 고이왕-책계왕-분서왕에서 구수왕의 아들인 비류왕으로 이어지니 그는 엄밀히 말하면 고이왕계는 아닙니다.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비류왕은 구수왕이 죽은 지 70년이 지난 뒤에 왕위에 올라 40년을 재위했는데요. 구수왕이 234년에 죽었기 때문에 구수왕이 죽기 직전에 비류왕이 태어났다 쳐도 344년에 사망했으니 대략 110세에 죽은 것이 됩니다. 바로 조작이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수왕과의 관계 외에도 비류왕 즉위 기사에서 대놓고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면서 이름을 떨쳤다(久在民閒, 令譽流閒)'는 기록이 나오는데 분서왕 사망 당시 왕위 계승과는 멀었던 인물인 점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의혹은 분서왕의 죽음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련이 있을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전에 고이왕은 정변으로 사반왕으로부터 정권을 취한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반왕과 관련된 구수왕의 후손들을 정적으로 삼고 다 제거했을 텐데요. 그럼에도 비류왕이 구수왕의 후손이라면 그것이 진실일지 의심하게 합니다. 
그런데 더 특이한 것은 비류왕시기에 대륙과 관련되 기사는 물론 분서왕대까지 혼인관계를 맺던 대방에 대한 기사도 없다는 것인데요. 굳이 대륙뿐만 아니라 전쟁이나 외교와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고, 천재지변, 반란, 사냥, 선정에 대한 기록만이 전해지며 비교적 큰 사건은 우복의 반란 정도로 그마저도 토벌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동아시아는 정세의 격변기로 중국은  오호십육국시대의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고구려는 미천왕이 낙랑군을 313년에 멸망시켰습니다. 다음해인 314년에는 대방군도 고구려에 의해 축출당하면서 백제 북변 거의 전체를 고구려가 차지하게 되었고  원삼국시대를 이탈하여 삼국시대로 본격 진입하는 시기인데 비류왕 다음 세대인 근초고왕 대에 남해안의 마한 소국을 제압하였던 만큼 과연 비류왕시기에 40년 치세동안 전투가 없었을까 생각하게 하는데요. 다만 누군가는 이것을 대륙백제와 연결시켜 비류왕시기에 전쟁이 없던 것은 그가 애초에 대륙백제와 관련이 없던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한편 책계왕은 고구려가 대방군을 공격했을 때 군사를 보내 대방을 도운 까닭에 피살당하고, 분서왕도 낙랑태수의 자객에 의해 살해된만큼 어쩌면 백성들의 불만도 커졌을지 모릅니다. 또한 비류왕 재위시절에는 천재지변이 많이 기록되었는데요. 어쩌면 이러한 내부적 상황으로 안해 비류왕이 외부에 힘을 쏟지 못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반면 각종천재지변의 기록과 더불어 반란기록은 비류왕의 정책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을 텐데요. 그전에 비류왕의 출현은 선대왕들의 전쟁활동에 대한 피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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