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고대사 미스테리 백제 진사왕의 죽음

2023. 8. 6. 07:5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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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류왕이 승하했는데 태자(훗날 아신왕)가 어리므로 숙부인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삼국사기』에서는 백제 16대왕 진사왕의 등극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침류왕의 아우로 385년 침류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진사왕에 대해서 『일본서기』에서는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요. 
‘백제의 침류왕이 죽자 왕자 아화의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인 진사가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었다(百濟枕流王薨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 『일본서기』
마치 후대의 일인 조선의 수양대군처럼 진사왕이 침류왕 사후 어린 조카 아신한테서 왕위를 찬탈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왕인 침류왕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승하한 것으로 보아 진사왕 또는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침류왕을 시해한 후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침류왕인 불교를 도입했으니 사상적 갈등으로 인해 진사왕 세력의 반발을 샀을 거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진사왕은 사람됨이 용맹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전해지는 군주입니다. 그러한 말을 생각해 보면 진사왕이 정치적 야망이 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진사왕은 387년에 진가모를 달솔애 임명하고 두지를 은솔에 임명합니다. 달솔(達率)은 백제의 제2품 관직이고 은솔은 백제 때의 관등으로 16관등의 하나로서 좌평(佐平)·달솔(達率)에 이어 제3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위관직을 받은 진가모와 두지는 『삼국사기』 「진사왕조」에 기록된 유이한 인물인데요. 아마도 이들이 진사왕의 왕위 등극에 일정한 역할을 한 데에 따른 대가로 그와 같은 품계를 받은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가모가 도곤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삼국사기』「진사왕 본기」

이 진가모는 390년에 위와 같은 전과를 올리기도 하는데요. 그 공로로 병관좌평에 임명되어 병권을 관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진가모 세력이 진사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면 진가모도 도가사상을 신봉한 진사왕에게 지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사왕은 이에 기분이 좋았던 것일까. 도곤성을 함락하고 한 달 후에는 구원의 북쪽에서 사냥하여 사냥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3달 후에는 궁실을 중수하고 연못을 팠습니다. 연못을 팠다는 것은 이에 더하여 동산도 꾸미고 진귀한 새를 기르며 기이한 화초도 기르는 등 왕으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391년의 일인데요. 말갈이 적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킵니다. 그런데 불과 석 달이 지났을 때 서 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즐겼고 그 다음 달에는 황악 서쪽지역에서 역시 사냥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1년 뒤에는 일식을 관찰했다고 하는데요. 태양을 통치자의 상징으로 여겼던 고대 왕조 국가에서 태양이 사라지는 일은 두려움 그 자체였으므로 이러한 일식의 관측은 당시로서는 예사스런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392년(진사왕 8) 봄에 고구려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습니다. 신라의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은 이찬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인 실성(實聖)을 고구려로 볼모로 보냈습니다. 이처럼 신라와 동맹을 맺은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 재위 391~413)은 392년(진사왕 8) 가을에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의 북쪽 변경을 대규모로 침공해 석현성(石峴城) 등 10여개의 성을 점령했습니다. 겨울에도 고구려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해 점령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관미성이 사방이 절벽이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광개토왕이 일곱 방면으로 병사를 나누어 공격케 해서 20일 만에 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진사왕이 고구려 광개토왕의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피해서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고을들을 고구려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사왕의 재위기간에 백제는 점차 고구려에 패하면서 한강 이북 지역의 여러 성들을 빼앗긴 것이고 그 상황의 변화에는 고구려에서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임금의 사냥을 어떤 의미일까. . 나라에 외적이 침입했는데 한가하게 사냥이나 즐기고 있는 무책임하고 한심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고대 시대의 사냥은 실제 전쟁과 직결되는 기마술, 궁술, 팀워크 훈련을 갈고 닦는 것으로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군대 점검, 훈련 정도로 봐야 한다고 합니다. 진사왕 나름대로 외침을 극복하기 위해 군대를 수습하고 점검이었을까요. 그런데 고대기록애서 왕이나 종친들의 사냥은 소송 대상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주로 사냥에 몰두하여 정무를 등한시하거나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는 내용입니다. 신라 이찬 김후직(金后稷)은 진평왕(579∼632)이 사냥에 몰두하자 죽어서까지 사냥을 막았습니다.

‘말 달리며 날마다 사냥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노자-
‘안으로 여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을 일삼으면, 그 중의 하나가 있어도 혹 망하지 아니함이 없다.’ 『서경』
후에 후직(后稷)이 병이 들어 죽기 전에 세 아들에게 자신의 유해를 진평왕이 사냥 다니는 길가에 묻어 달라고 하였고, 아들들은 그렇게 따랐습니다. 어느 날 왕이 출행하는 도중에 먼 거리에서 “가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듯한 소리를 들었는데, 왕이 돌아보며 “소리가 어디에서 오는가?” 물으니, 따르는 사람이 고하기를 “저것이 후직 이찬의 무덤입니다.” 하고, 후직이 죽을 때 한 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의 충간(忠諫)이 사후에도 잊지 않으니, 나를 사랑함이 (이토록) 깊도다. 만일 (내가) 끝내 고치지 아니하면 유명간(幽明間)에 무슨 낯으로 대하겠는가?” 하고, 죽을 때까지 다시 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대임금이 사냥을 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업지만 392년에 고구려군대가 침략해오는 와중에도 사냥을 즐겼다는 것은 상식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삼국사기』에는 11월 진사왕이 그냥 구원의 행궁에서 사냥에 몰두하다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요.  10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고 서술된 기록을 보면 사망 후 10일이 지나서야 수색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 해에 백제 진사왕이 즉위하여 귀국 천황에게 무례하였다 . 그래서 키노츠노노스쿠네, 하타노야시로노스쿠네) , 이시카와노스쿠네, 츠쿠노스쿠네 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녜 등은 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일본서기』
『일본서기』에 기록된 진사왕의 폐위내용인데요. 이 기사를 보면 편찬자가 자기 입맛에 따라 각색하고 윤색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이 기사를 무시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일본이 백제 내정에 간섭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천황이 보낸 사신이 예없음을 힐책하였고 그에 따른 일본의 후속조치는 없었습니다. 그냥 진사왕이 제거되고 아신왕이 오른 것에 대해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진사왕이 일본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침류왕의 동생이므로 본래 침류왕의 아들인 아신이 왕위를 이어야 하므로 정통성에 있어서 위협을 받았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게다가 고구려의 싸움에서 거듭된 패전으로 진사왕의 권위는 실추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아신왕이 정변을 도모하고 단독으로 아신왕을 백제 내 지지세력만으로 성공한 것인지 아니면 왜의 세력을 등에 업고 성공한 쿠데타인지 혹은 진사왕이 애초부터 침류왕의 아들 아신(아신왕)을 후계자로 삼았고 아신왕의 급성장하자 정사에 관심을 쏟지 안았다가 왕위에서 쫓겨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일본서기』를 미루어 왜 세력이 진사왕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가정했을 때 당시의 왜 세력이 정말 열도에 있던 사람들인지 생각한다면 진사왕의 죽음에는 우리가 풀지 못하는 많은 고대사의 비밀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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