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전지왕은 왜 상좌평을 설치했을까
2023. 8. 8. 07:5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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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18대왕은 전지왕입니다. 태자 시절 이름은 '영'으로 아신왕 3년에 태자에 봉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신왕이었으니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을 상대로 번번이 전쟁에서 패했으며 특히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신왕은 고구려와의 대결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97년에 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태자 영을 볼모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405년에 아신왕이 승하하게 되었는데 급작스런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이면에는 아신왕의 동생인 부여훈해가 태자가 귀국할 때까지 섭정을 맡고 있었으나 아신왕의 막내동생인 부여설례가 진씨 세력과 모의해 쿠데타를 일으켜 부여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것입니다. 왜왕은 군사 1백여명으로 하여금 전지를 호위하여 백제에 귀국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정국은 숙부인 혈례가 장악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대왕께서 새상을 뜨신 후 왕의 아우 혈례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태자께서는 경솔하게 들어가지 마소서.’ 『삼국사기』
이 때 해충의 말을 듣고 전지는 서울로 가는 것을 일시 정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섬에서 기다리며 동정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지태자는 반 혈례세력과 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혈례가 제거되었고 전지태자가 왕위에 오르게 된 그가 바로 전지왕입니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도움을 준 해충은 달솔로 삼았고 한성의 조(租) 1000석을 주었으며 재위 3년(407)에는 서지 여신을 내신좌평으로, 해수를 내법좌평으로, 해구를 병관좌평으로 삼았습니다. 이 때 내신좌평은 왕명의 출납을, 내법좌평은 의례와 의교 및 교육을, 병관좌평은 군사와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는 벼슬입니다. 이를 통해 떠오른 세력은 해씨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근초고왕 대부터 아신왕 대까지 왕비를 배출하며 그 힘을 과시한 진씨세력은 정치권에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지왕대부터 삼근왕까지 5대에 걸쳐 해씨가문 왕비가 나옵니다.
‘4년 봄 정월에 여신을 임명하여 상좌평을 삼아 군사 임무와 나라 정사를 맡겼다. 상좌평의 직제가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지금의 재상과 같은 것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는 본래는 왕명의 출납을 맡았던 것이 내신좌평(內臣佐平)이고 이를 포함하여 6명의 좌평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좌평의 임무를 분화하는 과정에서 상좌평이 생겨났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좌평은 국왕을 보좌하여 왕권강화에 기여한다는 일반적인 해석에 다소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하는데요. 일단 그러한 의견에는 왕이 상좌평을 임명하지 않았다는 데에 기인합니다. 상좌평의 선임은 정사암회의 즉, 귀족회의에서 결정된 것입니다. 전지왕 시절 상좌평이 된 여신은 전지왕으로부터 군국정사를 위임받습니다. 군국정사는 군사권과 민사권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이러한 일은 단 두 번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특정개인이 실권을 쥐는 것이므로 왕권이 약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여신이 전지왕이 혈례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해씨세력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여신이 왕족이고 그가 상좌평이 되었다면 왕권강화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상좌평은 군국정사를 위임받아 막강한 힘을 발휘했을 텐데요. 물론 고구려의 대대로나 신라의 상대등처럼 상좌평의 설치는 왕권을 강화시키는 목적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웅진 도읍기에는 문주왕을 살해하고 어린 삼근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기여한 병관좌평 해구에게 군국정사를 일임했다는 것은 상좌평이 왕권강화의 의미보다는 지배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의사를 대변하는 제도적 장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당시 전지왕은 자신의 힘이 아닌 신하들에 의해 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전지왕이 그러한 것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상좌평을 신설할 수 있습니다. 전지왕이 상좌평을 설치한 것은 재위 4년의 일입니다. 당시는 이미 해충이 달솔에, 해수는 내법좌평에, 해구는 병관좌평에 있었으므로 조정에서 해씨의 입김이 세지는 것은 불보듯뻔한 일입니다. 어쩌면 정치적으로 해씨세력에게 기우는 것을 방지하고자 상좌평을 설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상좌평은 왕권강화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좌평을 설치한 전지왕대에는 아신왕과는 달리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기사가 없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에 대한 외교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가령 대외관계에서 전지왕은 동진(東晉)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유지해, 416년에 ‘진동장군 백제왕(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작호를 받았으며 또 왜와의 우호 관계도 계속 유지했는데,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온 왜의 사자를 우대하고 왜에 비단〔白錦〕 10필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즉, 이전까지의 전면전에서 벗어나 외교를 통한 견제로 전환한 것으로 고구려와의 전쟁에 적극적이었던 진씨 세력이 물러나고, 반대로 온건한 입장을 보이던 해씨 세력이 대두한 것과도 관련 짓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상좌평을 왕권강화와 관련짓는 것은 무리는 아닙니다.
그럼 전지왕의 왕비를 살펴볼까요. 『삼국사기』에는 그의 부인으로 팔수부인이 나옵니다. 팔수부인은 전지왕이 즉위하는 405년에 구이신왕을 낳았습니다. 아이부인 진씨와 달리 팔수부인의 출자는 확실치 않은데, 이에 대해서는 해씨(解氏) 설과 일본 귀족 여성이라는 설이 제기됩니다. 일단 해씨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해수와 해구를 왕척(王戚)이라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해씨녀를 태자비로 맞았다면 그로 인해 위기의식을 느낀 진씨세력들이 혈례를 지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씨세력이 혈례를 살해한 것은 왕비족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팔수부인이 해씨라면 405년 9월에서 12월 사이에 아들을 출산하기가 힘들다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전지가 왜에 머물렀기 때문인데요. 침류왕이 승하하였을 때 그의 아들인 아신이 유소(幼少)하다는 이유로 숙부 진사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진사왕은 8년간 재위하다가 392년에 죽게 됩니다. 만약 385년에 아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숙부인 진사왕이 왕위에 올랐다면 아마 당시에는 아신이 15살을 넘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사왕아 죽는 392년에는 아신왕은 23살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아신왕이 20세가 되었을 때가 389년이라고 한다면 이때를 전후하여 결혼하였을 것이고 이후 1~2년 뒤에 아들 전지를 낳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전지가 왜로 파견되는 397년에는 채 10살도 되지 않았을 시점입니다. 그 후로 백제로 전지가 귀국할 405년에는 결혼적령기인 10대 후반으로 가는 시점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전지는 이미 왜에서 왜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팔수부인을 왜인으로 보는 것인데요. 특히 그는 백제 태자이므로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재외백제인출신보다는 왜의 왕녀이거나 고위귀족의 딸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전지왕의 부인의 성씨는 전해져 오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해수와 해구를 전지왕대에 내법좌평과 병관좌평으로 임명했다는 점, 그리고 모두 왕의 친척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해씨 왕비가 있었던 것을 보는데요. 하지만 태자의 왕비가 왜인이라고 하면서도 해씨가 전지왕이 오른 후 고위관리직에 임명된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아마 전지왕이 귀국하고 나서 해씨집안의 여자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전지왕은 405년 10월에 왕이 되었고 407년 해수를 내법좌평에, 해구를 병관좌평에 임명합니다. 아마 그 사이에 해씨 여자를 두 번째 왕비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왜에 8년 동안 가 있던 전지왕은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해씨집안사람과 혼인하였고 해씨집안도 이러한 정치적 관계를 맺는 것에 찬성했을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된다면 조정에서 해씨가문의 입김이 세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요. 407년에 해씨집안사람들을 고위직에 임명하고 그 이듬해에 제1관등인 좌평을 한단계 격상시킨 상좌평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마 해씨 주도의 정국에 반발한 다른 대신들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관직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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