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 종언 개로왕 피살

2023. 8. 10. 08:0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728x90

비유왕은 죽고 나서 왕위를 이은 개로왕이었습니다. 개로왕(蓋鹵王)은 백제의 제21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55년~475년입니다. 비유왕은 그의 죽음은 흑룡과 관련되어 기술되어 있는데 비유왕의 죽음 시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따라서 개로왕의 등극도 순탄치 않았을 것입니다. 개로왕 초기 14년간의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임시로 매장되어 있던 부왕의 뼈를 개로왕 21년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장사지냈다는 점은 여러모로 의심스러울  수 있는데 비유왕 시기 해씨세력이 워낙 강하였고 이를 제어하지 못하여 비유왕은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비유왕 사후 해씨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은 개로왕을 지지하는 세력에 의해 해씨가 제압당했던 것 같습니다. 백제가 혼란을 빠져있다고 생각했는지 455년 10월 고구려가 쳐들어왔으나 신라의 도움을 받아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개로왕은 고구려 승려 도림과의 일화 때문에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으나 그는 왕권강화에 힘쓴 왕입니다.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상좌평 자리를 그의 동생인 문주에게 주었다는 것인데요. 비유왕 대에는 상좌평직에 있던 여신이 사망하자 이를 승계한 것은 해수였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정치나 군사권은 해씨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런데 문주가 상좌평에 있음에 따라 개로왕 대에는 병권을 왕족이 장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눈여겨볼만한 것은 『송서』에 의하면 개로왕 즉위 3년인 457년에 유송으로부터 진동대장군을 제수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개로왕은 그 신하 11명에 대한 관직을 요청하여 장군호를 제수받습니다. 여기서 11명의 귀족 가운데 8명이 부여씨 왕족이고 나머지 3명은 이와는 성씨가 다른 귀족이었는데 해씨와 진씨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개로왕 대에 지배체제 내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듯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러한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 중 일부는 고구려로 이탈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반면 개로왕 초기에 왕 또는 장군호를 제수받는 왕족 및 이성 귀족이 출현합니다. 아마 이는 개로왕을 지지하는 세력들로 보고 있는데 누군가는 반대로 왕의 통제력 약화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개로왕 스스로는 ‘대왕’으로 격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서기』에서는 ‘국왕 및 대후와 왕자 등은 모두 적의 손에 몰살당했다.’라는 기록을 실은 것처럼 ‘대후(大后)’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를 통해 개로왕 대에 대왕권을 확립되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개로왕의 권한은 귀족의 그것을 누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개로왕 단독으로 해씨나 진씨세력을 압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유송으로부터 제수받은 귀족가운데 용양장군 목금이 있는데 어쩌면 개로왕의 등극에 목씨가 힘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문주왕의 웅진천도시 목씨로 간주되는 목례만치가 문주왕을 보필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관군장군 부마도위 불사후 장사 여례를 등용하니 그는 부여씨로 왕족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진세력으로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을 등용하였는데 재증씨나 고이씨는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 성씨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개로왕이 후에 승려 도림을 등용하자 고구려로 망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용양장군 대방태수 사마 장위라는 중국계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이후 고구려 승려 도림이 건의에 따라 건축된 대규모 토목공사는 백제의 국력을 약하게할 목적으로 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규모공사는 왕권신장과 관련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조선후기 왕실권위 회복을 위해 흥선대원군이 벌인 경복궁 중건과 비슷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로왕의 왕권강화에 찬 물을 끼얹은 것은 바로 고구려 장수왕의 적극적인 남진정책이었습니다. 솔직히 이러한 남진정책은 왕권강화를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던 개로왕에게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개로왕대의 외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북위(北魏)와의 관계입니다. 개로왕은 집권 4년 만에 송에 표문을 보내 신하들에 대한 관작의 승인을 요청한 바 있었습니다. 이때 대고구려 유화정책을 주장하던 해씨세력을 배제시킴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강경책으로의 전환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20년 이상 중단되었던 북위에 대한 조공을 재개하기에 이릅니다. 특히 472년(개로왕 18)에는 북위에 표문을 보내 고구려의 잦은 침략을 호소합니다. 국정 혼란과 내분을 틈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개로왕은 북위의 사신들이 탄 배가 백제로 오는 도중 폭풍에 난파당해 전원 사망했는데 이를 고구려가 한 짓이라고 주장하며, 잔해물 중에서 말 안장 하나를 건져 증거로서 북위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북위 측에서 확인해 보니 그 안장은 북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설령 북위 것이 맞더라도 북위가 고구려와 전쟁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백제 입장에서 이 같은 요청은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북위와의 군사적 동맹을 통해 고구려를 압박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북위가 이를 거절하고, 백제는 북위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기에 이릅니다.

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내다

어찌되었든 개로왕의 이러한 외교적인 노력은 백제에게는 위기로 다시 작용하게 됩니다. 일명 개로왕 국서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의 핵심인 국서가 장수왕의 심기를 건드리고 만 것입니다. 장수왕의 증조부인 고국원왕 전사 사건도 오롯이 적혀 있고, 장수왕도 죄인이라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고국원왕은 화살을 맞고 병상에서 죽었지 목 베여 죽지는 않았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가 북위가 답신을 보내는 방법도 처음에 백제로 사신을 보낼 때 육로로, 그러니까 고구려를 통과해서 보내려고 시도했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는 더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놓고 자신의 영토를 지나 고구려를 위기에 빠뜨리려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주고받는 것은 황당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북위는 육로로 국서를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해로로 보내려 했으나 이마저도 바닷길이 험하여 이루어질 수 없었고 북위의 답신은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장수왕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승려 도림(道琳)을 간첩으로 파견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백제에 잠입해 바둑과 장기 등으로 개로왕의 환심을 산 도림은 국왕 권위의 회복을 명목으로 개로왕에게 성곽과 왕궁의 보수, 선왕(先王) 무덤의 축조, 대규모 제방의 건설 등을 추천했고 개로왕이 도림의 권고를 모두 받아들인 결과 백제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아챈 장수왕은 3만 명의 군대를 지휘해 백제를 침공했고, 곧 도성인 한성을 포위한 후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백제의 도성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북성(北城)[지금의 풍납토성]과 비상시에 요새로 사용하는 남성(南城)[지금의 몽촌토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박(狛)(고구려)의 대군이 대성을 7일 낮과 밤을 공격해서 왕성이 함락됨에 따라 드디어 위례를 잃었다.’ 『일본서기』
고구려군은 북성을 7일 만에 함락시킨 후 곧바로 남성을 공격했고, 남성으로 피신했던 개로왕은 남성 함락 직전 도주했으나 결국 고구려군에 사로잡힌 후 아차성(阿且城)[지금의 아차산성]으로 끌려가 처형당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로왕을 사로잡은 고구려군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은 본래 백제인이었지만 죄를 짓고 고구려로 달아난 인물이라고 하는데,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을 개로왕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발생한 정변 중에 축출된 자들이라고 본 견해도 있습니다. 한편 개로왕은 함락 직전 동생인 문주(文周)를 동맹 관계였던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신라 조정은 구원병 1만 명을 파견했지만, 문주와 신라군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한성 함락과 개로왕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개로왕의 피살로 인해 왕족중심 지배체제가 전면적을 붕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웅진백제 초기 백제의 왕권의 약화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