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위강국을 선포한 백제 무령왕

2023. 8. 12. 09:1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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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표준영정

백제의 제25대 왕은 무령왕으로 성은 부여(扶餘)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사마 (斯麻) 또는 융(隆)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는 ‘사마왕’으로도 불리니  즉 섬왕입니다. 그러한 이유는 그의 어머니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가는 도중 섬에서 무령왕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개로왕은 아우인 곤지를 일본으로 보냈고 그러면서 개로왕의 임신한 부인까지 딸려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산기를 느껴 후쿠오카 북쪽의 가카라시마라는 섬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서기』에서 461년에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으며, 실제로 무령왕릉 발굴 결과 523년에 사망할 당시 62세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고대 임금으로 생몰년이 비교적 명확한 편입니다. 그런데 개로왕이 왜 자신의 임신한 부인을 곤지에게 딸려 보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요. 형사처수제가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개로왕이 살아있던 지라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개로왕은 곤지를 왜에 보내려했고 이에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던 곤지는 개로왕의 부인을 같이 가게 해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왜국으로 간 곤지는 다섯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 중에 동성왕과 나머지 동생들이 곤지가 왜에서 만난 여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첫째 아들은 곤지가 의자로 받아들인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곤지에게 무령왕은 개가하여 온 아내가 데리고 들어온 아들. 또는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들과 비슷한 의미인 것인데요. 『일본서기』에서 동성왕과 무령왕에 대해 이모형제라고 하였는데 아마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게 즉위한 무령왕이 해야 할 일은 반란을 일으킨 백가에 대한 일을 처리하는 것이었고 백가를 잡아다가 처형하고 그 시신을 백강에 던져버리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매장조차 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인데 『삼국사기』에서는 무령왕에 대해 ‘신장이 8척이요, 얼굴이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웠으므로 민심이 귀부하엿다.’고 하였습니다. 인자한 그의 마음과 달리 반란자에게는 용서가 없었던 셈인데요. 그의 너그러운 성품을 알 수 있는 행정으로 그전 왕인 동성왕은 주민들이 굶주리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창고문을 열어주자고 했으나 거절하였는데 무령왕은 주민들이 굶주릴 때 창고문을 열어 구제했다고 합니다. 

무령왕은 왕족중심의 정치운영을 꾀했는데 동성왕 대에는 한성이 함락되어 많은 왕족들이 희생되었으므로 다른 성씨 귀족에 의한 정치운영을 피할 수 없었는데 무령왕을 이를 억제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부(部)를 설치하고 관등제를 설치했는데 이러한 것으로 귀족들을 통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덕계 관등을 두어 신진세력들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22담로를 설치하였으며 군의 장관인 군령, 그리고 성의 장관인 성주를 두어 새로운 지방통치조직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처우도 개선하였습니다. 510년에는 봄에 저수지를 완비하고 농사 지을 땅이 없어 떠도는 자들을 위해 귀농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호적제를 정비하여 자국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노동력 동원으로 관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령왕은 무엇보다 영토확장에 그 힘을 기울였습니다. 무령왕은 즉위하였고 503년 9월 고목성에 쳐들어온 위말갈을 격퇴시켰습니다. 그 해 11월에 달솔 우영(優永)에게 5천 군사를 주어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 황해도의 신계에 위치한 수곡성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무령왕을 이를 기회로 영서 말갈 세력의 연결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다음해 겨울에도 무령왕은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였으니 그 지역은 신계의 수곡성과 임진강 북안지역이었습니다. . 507년 5월에는 고목성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으며, 10월에 고구려의 장수 고로(高老)가 위말갈과 함께 쳐들어와 횡악(橫岳) 아래에 주둔하자 다시 격퇴시켰습니다. 512년 9월,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습니다. 무령왕은 민생을 안정시키면서 그 힘으로 고구려 및 말갈과 전투를 벌이면서 예성강 남안까지 확장하였습니다. 
무령왕 대에는 강국으로 인정받았는데 강력한 군사력은 남벌로 이어졌습니다. 섬진강 유역과 가야지역경략에 나선 것입니다. 백제가 약해지면 대가야가 강해지며 그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 고령양식의 토기는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대가야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자 전북 동부지역으로 진출하였으며 백제가 고구려와 싸움을 벌일 동안 대가야는 소백산맥을 넘었습니다. 대가야는 6세기를 전후하여 여수와 순천을 포함하여 전남동부지역까지 그 힘을 뻗치고 있었고 당시 대가야왕이었던 하지는 479년에 남제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의 작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령왕이 고구려와의 일전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며 안정시키자 남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이후 섬진강유역으로 진출하였으며 해당지역의 주민들을 편입시켜 호적을 정리하니 그곳은 남원을 포함한 임실, 장수 등 전라북도 동부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백제의 진출에 대가야는 어떤 힘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백제는 섬진강 중상류를 차지한 후 그 하류로 진출하였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느 ’임나사현‘에 해당하는 지역을 백제에게 할양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일본서기』 특유의 자국중심의 윤색일 뿐 사실상 백제가 이 지역으로 진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지역에 대해 지방관을 보내 직접 지배한 것은 아니고 토착사회의 수장층을 이용하여 간전지배 형태로 공납지배를 실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가 이 지역에 대해 직접 지배를 가져간 것은 사비천도 이후일 것입니다. 이에 대가야는 반격을 가했습니다. 소백산맥을 넘어 전북 동부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군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기문 지역을 차지하였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백제가 반격했고 대사(帶沙)를 놓고 백제와 대가야가 대립하였습니다. 당시 왜국은 대가야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514년에 물부연(物部連)이 이끄는 500명의 수군을 다사진에 파견하였습니다. 무령왕 대에는 백제와 왜의 관계가 더욱 끈끈했는데요. 그 결과로 대가야는 대사진을 백제에 내주게 되었고 낙동강 하구 역시 신라가 차지하고 있어  대가야는 독자적인 교섭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충남 공주시 무령왕릉 석수

‘겨울 11월 사신을 양날에 보내 조공을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쇠약해진지가 여러 해였다. 이때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일컬었다’ 『양서』
475년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갔으나 그로부터 46년이 지나 백제는 고구려를 뛰어넘는 국력으로 회복하였고 ‘갱위강국’으로 주변국들에게 천명한 것입니다. 일례로 521년 양무제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의 작호를 제수받았습니다. 이는 으레 나오는 명목상의 책봉 기록이지만 은근히 의미가 큽니다. 양나라는 앞서 502년에 고구려 문자명왕을 '거기대장군', 무령왕을 '정동대장군'으로 봉했는데, 둘 중 고구려 쪽이 더 위계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520년 양나라는 고구려 안장왕을 '영동장군'에 책봉한 반면 이번에는 백제 무령왕을 그보다 더 높은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했습니다. 양나라가 백제의 위계를 고구려보다 높게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2019년 9월 공주시가 9월의 역사인물로 백제 25대 무령왕을 선정했습니다. 무령왕은 대내적으로 즉위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효과적으로 극복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비롯해 사회, 경제적 안정을 이뤘으며,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의해 상실한 한강유역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백제가 예전의 국력을 회복하는데 성과를 거뒀으니 현대에서는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고 문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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