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의 대외확장과 그 노력

2023. 8. 13. 09:1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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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고구려의 침략 속에서 신라와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고 양 나라와의 교류도 지속하였다. 사비로 천도한 성왕은 내부의 결속과 영토 회복을 꿈꾸었다. 사진은 부여시내에 있는 성왕의 동상.

백제성왕은 523년에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결단력 있게 일을 처리하였다.’고 하고 『일본서기』에서는 ‘하늘이 도와 땅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며 명성을 사방팔방에 퍼졌다.’라고 하니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그는 즉위한 523년에 고구려군이 패수에 오자 좌장(左將) 지충에게 보병 1만을 주어 무찌르게 하였습니다. 성왕은 중국 남조와 신라, 애, 가야 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524년 양나라(梁)와 국교를 더 긴밀히 하여 양무제로부터 '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을 책봉 받았습니다. 하지만 즉위 7년째 되는 529년에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한강 이북지역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의 안장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강화도에 위치한 혈성(穴城)을 함락하니 성왕도 이에 맞대응하여 연모(燕謀)에게 3만 명의 군사를 주어 황해도 서흥 쯤으로 보는 오곡의 벌판에서 싸우게 했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련의 전투로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이북을 내주고 만 것입니다. 이 지역은 무령왕 때에 고구려가 백제에게 뺏긴 지역입니다. 따라서 성왕은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섬진강 건너 하동을 장악합니다. 성왕은 섬진강 하류지역을 차지하며 대가야의 대외교섭로를 가로막은 것입니다. 성왕은 530년에 함안 안라가야에 군령(郡令)과 성주를 파견하여 그 지배를 가져가려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동 외에도 함양, 산천 등 그 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백제는 고령의 대가야를 압박하였고 대가야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와의 연합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법흥왕이 522년에 대가야가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자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 혼인을 올린 것입니다. 하지만 법흥왕은 이를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보았습니다. 신라는 525년에 사벌주(창녕)에 군주를 두고 529년부터는 가야제국에 대한 공세를 지속하여 남가라, 탁기탄, 탁순을 복속한 것입니다. 백제는 함안의 안라가야를, 신라는 대가야를 앞세워 낙동강 서쪽 지역을 두고 대립하였습니다. 한편 대가야에 시집온 신라 왕녀들의 의복을 두고 대가야와 신라 간에 갈등이 생겨 마침내 그들의 관계가 파기되기에 이르렀고 임나왕 기능말다간기 자신이 직접 왜국으로 가서 출병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530년 법흥왕의 요청을 받아 왜의 출병이 중지되었습니다. 한편 백제는 안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구례모라성을 쌓고 점령하고 있었으나 이를 신라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532년 신라가 철군하면서 5성을 추가로 점령하였으며 백제입장에서는 대가야 진출의 군사적 거점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가야남부지역은 서남부지역은 백제에 의해, 동남부지역은 분할통치되는 양상이었습니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에도 밀리고 가야진출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근본적인 해결책을 구상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사비천도입니다.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고 나서 백제를 쇄신하도록 합니다. 일단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가지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涅槃等經義)를 수입하여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담로제를 개편하여 동방, 서방, 남방, 북방, 중방의 5방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방군성제를 실시합니다. 한편 써 성왕은 정치 운영에 있어서 귀족 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성왕은 541년과 549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가졌으며 왜국에 의박사, 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왜에 파송하여 석가 불금 동상 1구, 번개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보내어 줌으로써 왜에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이렇게 국정을 정비한 성왕은 다시 한 번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사비천도 2년 뒤인 540년에 장군 연회(燕會)로 하여금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도록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이에 맞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합니다. 성왕은 이에 신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독산성 전투는 백제와 신라의 압박으로부터 남은 가야의 소국들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 신라에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한편 백제는 가야 소국의 군주들을 두 차례 사비성을 불러 모아 사비회의를 열었습니다.
541년 백제는 대가야, 안라 등의 7개 소국 대표들과 1차 사비회의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백제와 가야연맹이 입장차가 있어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544년에는 2차 사비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백제 성왕은 이 회의에서 가야 연맹을 보호하기 위해 ‘신라와 안라의 국경 지역인 낙동강 변에 6개의 성을 쌓고, 왜인 병사 3,000명과 백제군을 주둔시키는 대신 비용도 백제가 대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또한 백제의 군령과 성주를 내보낼 수 없는 것은 가야와 왜국의 교류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며,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에 대비하여 가야 연맹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그리고 일부 왜신관을 왜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가야 3개국 재건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왜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가야 연맹은 이런 공격적인 제안에 아무도 제대로 답하지 못했고, 지도국인 안라국과 반파국의 군주에게 보고하겠다고 한 뒤 해산하였습니다. 

 남은 가야 소국들 중 비교적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아라가야(안라국)는 백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왜국에게까지 도움을 청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호응한 고구려군이 고구려에 속국화된 동예인들을 대거 동원해서 백제의 북방을 공격했습니다. 신라는 주진(朱珍)에게 3,000명의 병사를 주어 보냈고, 결국 고구려군은 신라-백제 동맹군에게 대패했으며 이를 빌미로 안라국은 백제의 식민지격으로 전락합니다. 안라국이 고구려를 사주하여 전쟁을 일으킨 것을 백제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이 전투에서의 타격이 컸는지 3년 뒤 나제동맹군의 대대적인 침략을 방어하지 못하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차지하고 100여년간 지배한 지금의 경기도부터 강원도까지의 한강 유역을 죄다 백제와 신라에 내주고 전성기를 마감하게 됩니다. 당시 고구려는 왕위 계승을 두고 분쟁에 휩싸였고 북제와 돌궐의 팽창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550년 1월에는 장군 달기를 보내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3월에는 금현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겼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상실한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신라와 가야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편성합니다. 가야의 병력은 백제에 편입시키고 신라를 별도로 부대를 조직하여 각각 한강 하류지역과 한강 상류지역으로 진격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는 돌궐에 신경 쓰고 있었기 때문에 목표는 어렵지 않게 달성되었습니다. 
‘〔진흥대왕〕 12년 신미(辛未; 551)에 …(중략)…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공격하여 격파하자, 거칠부 등은 승세를 타고 죽령(竹嶺) 바깥에서 고현(高峴) 안쪽에 있는 〔고구려의〕 10군(郡)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삼국사기』 「거칠부(居柒夫)」
하지만 550년에 도살성과 금현성은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고 이로써 신라는 진천과 연기 일원까지 확보하였습니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이에 거칠부가 이끄는 신라의 군대가 고구려의 10군을 빼앗은 것인데요. 성왕은 신라와 함께 진격하여 백제 전성기 영역을 확보하려 했으나 신라가 이를 거부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신라는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으며 백제를 압박하며 수세로 몰아넣었습니다. 사실 제라동맹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에 대해 공동대처한다는 점에서 이해관계는 같았지만 549년 백제와 고구려와 싸울 때에 신라가 백제성을 차지했었고 그 외의 가야의 지역이나 국경 지역의 요충지를 둘러싸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었으니 이 둘의 관계는 말 그대로 적과의 동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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