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은 어떻게 왕이 되었나
2023. 8. 17. 09:22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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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은 『삼국사기』에서는 법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습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빈모와 지룡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서동으로서 생활을 하다가 왕이 되었다고도 하고 ‘아버지가 기틀을 놓고 아들이 만들었다.’고도 합니다. 한편 『북사』에서는 법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설 가운데 무왕이 빈모와 지룡의 아들이라는 설은 설화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안에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면 서동 설화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동은 궁 밖에서 생활했다고 하는데 만약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면 굳이 궁 밖에서 생활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동이 서자라도 하여도 혹은 어머니가 미천한 가문의 출신의 여자라 하여도 당시에는 궁 안에서 생활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근거는 『삼국유사』 왕력에는 전왕과 현왕의 관계를 아들이나 동생으로 모두 표기하는데 무왕은 법왕의 아들이라는 표기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 융의 묘지명에는 조(祖) ‘조’과 부(父) ‘의자’만 표시되어 있으니 법왕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중국에서 출토된 백제유민의 묘지명 11개 중에 8개가 증조부터 표기하고 있는데 부여 융의 경우는 증조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생략할 수 있으나 어쩌면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한편 서동설화에서는 ‘경사 남쪽의 못 가’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경사는 수도이므로 사비일 것이고 익산에 마룡지가 있고 말통대왕의 어머니가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라 서동의 출생지를 익산으로 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경사 남쪽으로 익산은 너무 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서동의 출생지를 익산으로 보는 주장은 무왕의 어머니는 부여(사비) 궁남지 출신의 미천한 과부로 봅니다. 어느 날 연못의 용(위덕왕)과 정을 통해 무왕(서동)을 낳았다는 것인데요.. 이후 어떤 사유로 궁남지에서 살지 못하고 익산 마룡지로 거처를 옮겨 무왕을 기르게 되었고 무왕은 마동(마를 캐는 아이)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일연이 기록한 서동설화가 사실이라면 무왕은 이 시기 선화공주와 혼인하였고 따라서 무왕의 세력기반은 전북 익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8대 법왕이 재위 1년 만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백제는 차기 왕통에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이때 사택가문의 사비세력과 익산세력이 결탁하여 무왕을 옹립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무왕이 법왕과 계보가 다른 왕족으로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몰락한 가문의 자손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마를 캐며 살았으니 그것이 무왕이 되기 전까지의 무왕의 삶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고구려에서 을불의 아버지 돌고가 봉상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나서 소금팔이했다는 이야기나 철종이 강화도령으로 살았던 것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서동은 왕족이나 몰락한 가문일 것이며 설화 속에서 서동의 아버지는 지룡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따지고 보면 무왕의 법왕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한편 백제부흥운동의 지도자로 복신이 있는데 그의 성은 귀실이라고 합니다. 귀실복신은 무왕의 조카라고 하는데요. 무왕의 아버지가 법왕이라면 귀실복신의 아버지도 법왕의 아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은 귀실이 아니라 부여씨가 되어야 하지만 역사 속에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이 귀실씨는 어떻게 나온 성씨일까. 원래는 부여씨였을 것이며 어떠한 이유로 부여씨에서 떨어져 나온 성씨로 보고 있습니다. 가령 관산성전투의 패배처럼 백제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올 사건이 있는 경우 이로 인해 몰락한 가문이 있을 수 있는데요. 서동의 집안도 그런 역사적 사건을 거쳐 몰락가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왕은 부여씨로 나오는데 이것은 왕조의 성씨를 유지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요. 귀실씨라 하더라도 백제왕이 되려면 부여씨가 되어야 했습니다. 만약 서동이 몰락가문의 후손이고 법왕이 사망하여 그 누군가가 왕위에 올라야했고 그 사람이 서동이라면 그도 역시 귀실 씨를 버리고 본래 성이던 부여씨를 취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던 이유는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정치세력들이 서동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대로 무왕이 움직여 주었을까요.
28대 법왕이 재위 1년 만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사택가문의 사비세력과 익산세력이 결탁하여 무왕을 옹립한다는 추측 아래 왕이 정실소생의 적자가 아니고 미천한 과부출신이었다면 무왕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신라에 적대적인 정책을 취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화부인은 무왕이 즉위 전에 얻은 부인이고, 사택왕후는 즉위 후에 새로 얻은 정실왕비라는 것입니다. 그럼 무왕이 이러한 출생배경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후보였고 다른 후보자 혹은 왕족들이 이미 사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법왕세력에게 위덕왕의 자식들이 죽임을 당하고 다시 법왕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법왕의 후손들이 제거당했을 경우입니다. 혹은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이자 혜왕보다는 법왕에 가까운 사람이었고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가 아닌 법왕의 딸로 보기도 하는데요.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이자 법왕의 사위로 올랐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무왕 대에는 8대 귀족가문 중에 해씨, 연씨, 백씨, 사씨 등이 모두 고루 등용되었고 파벌싸움이 이전보다 덜하다고 했는데요. 이것을 무왕 대에는 위덕왕 세력과 법왕 세력간의 화해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위덕왕계의 무왕과 법왕계의 선화공주가 결혼한 것이 그 배경이라는 추측인데요. 그리하여 『삼국유사』에서 서동과 선화공주가 결혼하는 것은 두 가문의 화해를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화공주가 미천한 가문의 딸인지 아니면 왕실가문과 연관이 있는 왕녀인지는 확신할 수는 없으며 정황상 신라의 왕가하고의 관련성은 다소 낮아 보입니다.
그리고 무왕의 고향에 왕릉급 무덤이 있는데 이른바 쌍릉입니다. 조선시대에 고려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에는 쌍릉이 '백제 무왕과 왕비의 무덤'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실제 조사 결과 쌍릉은 백제 말기에 무덤을 만드는 방식과 같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마침 무왕의 고향도 익산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쌍릉 중 대왕릉은 무왕, 소왕릉은 선화공주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6년 국립전주박물관은 대왕릉에서 나온 치아를 분석해 ‘20~40세 여성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합니다. 그러자 '대왕릉은 무왕이 아닌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대왕릉에서 나온 유물 중 신라 양식의 토기가 있다는 점도 근거가 되었는데요. 만약 무덤이 선화공주의 것이라면 선화공주는 미천한 가문의 여자도 아닌 오히려 신라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18년 다시 반전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발굴 조사에서 대왕릉에서 사람 뼈가 담긴 나무 상자가 나왔습니다. 1917년 조선총독부가 쌍릉을 처음 발굴했을 때 파냈다가 다시 묻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모두 102조각에 달하는 뼈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4개월 동안 정밀 분석한 결과 "살아 있을 때 넘어져 다친 적이 있는 키 161~170㎝의 남성"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조선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 키 161.1㎝와 비교하면 큰 편인데요.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유골 주인공의 사망 연도는 서기 620~659년으로 추정됐는데, 무왕은 64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왕릉이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다시 커진 것이죠. 전문가들은 앞서 발견됐던 이빨을 여성으로 추정한 것을 오류로 보고 있습니다. 쌍릉 중 대왕릉의 실체가 다름 아닌 백제 무왕릉일 가능성이 커졌지만 그렇다고 100% 확신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왕릉으로 보고 있는 쌍릉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도굴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추가 발굴이 되어 진실이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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