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세자교육과 사대부의 손자교육일기 양아록

2023. 2. 14. 18:3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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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입학도첩

조선시대에는 현대와 마찬가지로 교육열이 높았습니다. 특히 궁궐에서도 세자를 위한 학습이 마련되었는데 일종의 예비 제왕을 가르치는 훈련이었습니다. 일단 세자에 대한 조기교육은 3세때까지 보양청이라는 곳에서 맡았습니다. 이곳의 실무 보양관 10여명이 세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가르친 것입니다. 정조는 세손시절에 붓과 먹을 가지고 놀며 책을 읽는 흉내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효자와 공자의 일생을 그린 그림을 보며 흉내내었습니다. 이에 대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중종의 원자는 만 2살 때에 『천자문』과 『유합(類合):한문학습서』를 절반이나 외워 중종으로부터 칭찬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보양청에서 교육을 받은 세자는 강학청이란 곳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이 곳에서 세자와 스승간의 상견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글자를 익히며 외우고 새로운 글자를 더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원자 옆에는 늘 붓과 종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자가 책 한권을 떼면 왕과 왕비 앞에서 발표회 비슷한 것을 열었는데 회강(會講)이라 부르는 이것을 통해 임금은 원자의 학습 진도를 보며 그에 대해 보상으로 스승들에게 다과를 베풀었습니다. 한 번은 영조가 원손이 『동몽선습』을 외우는 것을 보며 그의 스승 남유용에게 학생에게 낙제를 시킨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남유용은 낙제점을 주고 싶어도 워낙 잘 외어 줄 수 없었다고 하니 영조는 이에 감동하여 호피를 내렸습니다. 이렇게 원자들을 교육하는 책들은 『소학』과 더불어 사서삼경(논어·대학·중용·맹자·시경·서경·역경)이 있었으며 이밖에도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 박세무의 『동몽선습』, 이이의 『격몽요결』이 학습서로 15살 때까지 기본교재로 채택되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다시ㅠ피 보양청에서 학습이 이루어지고 난 뒤에는 강학청으로 교육기관이 올라갔으며 세자가 책봉되면 세자시강원에서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이 곳에는 세자 한 명에 스승 20여 명이 배치되었습니다. 그전에 왕세자는 공자님께 술잔을 올리는데 이것은 성균관입학식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장면을 담은 것이 바로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입학식으로 당시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왕세자입학도첩」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학식을 전하는 그림은 효명세자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세자의 모습은 그리지 않고 노란색 사각형으로 그 위치를 표시하였습니다. 입학식에서 효명은 학생이므로 교복으로 갈아입고 공자에게 잔을 올린 뒤, 스승에게 세 번 배움을 청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자의 교육을 맡게 된 세자시강원은 세조 때 설치되었으며 현재 경복궁 안에 그 터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 교육은 하루에 세 번 이루어졌는데 법강(아침, 점심, 저녁강의)과 불시에 받는 소대 및 야대,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회강이 있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열리는 복습행사는 현재 「회강반차도」라는 그림으로 남아 있는데 왼쪽의 두 명의 사람은 각각 사(師)와 부(傅), 즉 제일 높은 스승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벼슬직으로 보면 정 1품에 해당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사와 부가 합쳐지며 지금의 사부라는 명칭이 생겨났으며 이들의 평가로 통(通), 약(略), 조, 불통(不通)으로 성적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럼 영조의 아들 사도 세자는 어땠을까. 영조는 먼저 얻은 아들 효장세자가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1728년에 사망하고 납니다. 이후 7년 뒤인 영조의 나이 42살에 얻은 사도세자를 얻었습니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세 살 무렵에 『효경』, 『소학』을 공부하였으니 이는 2년 정도 진도가 빠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살 때에는 왕(王)자를 보고 영조를 가리켰으며 세자(世子)를 보고 자신을 가리키는 등 어려서 천재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너무 강압적이 교육환경이 문제가 되어서일까. 이후 영조와 사도세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고 이러한 아들에 대한 교육실패가 세손 정조에 대한 교육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정조의 교육은 사도세자보다 늦게 시작한 것입니다. 

한편 조선시대에 할아버지가 쓴 육아일기가 있으니 『양아록』이라는 책으로 이것은 묵재 이문건이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이문건은 이조좌랑을 지낸 문신으로 51세 때에 큰형의 아들 휘가 을사사화로 화를 입었고 연좌죄로 성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2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안동 김씨 김언목의 딸과 결혼하여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아들 온만 살아남았고 그러다 이 온이 결혼하여 내리 딸만 낳아가 아들(숙길)을 낳아 크게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기쁨과 더불어 조선 전반기에는 아이에 대한 교육을 본가와 처가가 교대로 하였으며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맡았으니 그의 감정과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해 자연스레 『양아록』이라는 책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사회상을 그린 그림을 보면 「평앙감사 뱃놀이」그림에서는 남자가 아이를 돌보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이 대부분 남자어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같이 있는 모습이 아닌 손을 잡거나 업고 있으니 아마 조선전기에는 아이 양육에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몫이 컸을 듯합니다. 어찌보면 유교사회에서 보면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조선의 남녀생활공간은 따로 분리되었는데 남자아이는 살아채에서 할아버지 밑에서 글을 배우고 손님이 찾아오면 인사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남자아이들은 남자어른들과 함께 했으니 그들에 대한 교육도 남자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아이의 양육은 여성의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한 조선후기라면 『양아록』은 상상하기 힘든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16세가 되는 1566년까지 성장발달의 시간적 순서에 따른 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평양감사 뱃놀이’.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고자 하나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다.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고독하게 홀로 거처한다. 오직 손자 아이 노는 모습을 보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장성해 이를 보면 글로나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이다.”
"태어난 지 7개월, 아랫니 두 개가 나다“
 "잠에서 깨어나면 매번 할아버지를 부르고, 내 가까이 오며 두려워할 줄 모르네“
“계축년(1553년) 윤5월에 처음 앓기 시작해 27일 한열(寒熱)이 났다. 아이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고통스러워하는데 처음에는 학질인지 알지 못하였다. …(중략)…17일 저녁부터는 곤히 자서 한열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때부터 병이 낫는 듯하다 끝내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몸이 몹시 야위어 측은했다.”
“꾸짖어 나무랐지만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틈날 때마다 떼 지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중략) 직접 일어나 나가서 데려와 정수리와 엉덩이를 때리자 고개 숙이고 엎드려 울어서 내 마음도 아팠다.”『양아록』
이 외에도 『양아록』에는 손자 숙길이 그네를 자꾸 타고 싶어하자 결국 그넷줄을 끊어버렸다는 이야기, 10살 때에 술을 마셔 혼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조선은 15세가 되면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고 하니 그 전에 술을 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숙길은 그게 좀 과했던 모양입니다. 술을 주면 계속 먹으니 이러한 모습이 할아버지가 보기에는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할아버지와 손자의 갈등은 이뿐만 아니었습니다. 손자가 공부도 게을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아버지와 손자의 마찰을 적은 『양아록』의 끝에는 손자에게 자주 매를 댄 자신에 대해 한탄하는 글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매질은 죽은 이후에나 그칠 것이라며 집필을 끝낸 것입니다. 이후 숙길은 입신양명하지는 못했으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에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던 지난 2015년 이 『양아록』이란 책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가정교육은 물론 출산풍속 등 사대부의 생활상을 들여다볼 수 있어 독보적인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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