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광해군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2023. 2. 24. 08:5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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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왕이 되었으나 왕으로 기록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조반정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에게 여러 죄목이 지목되어 물러나게 되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인목대비 폐비 문제였습니다. 그는 왜 그래야 했을까. 현대에 들어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성군을 쫓아냈다라는 평가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에 나라를 위해 뛰어다니고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역사서에 기록된 그의 이미지와 반정으로 쫓겨난 것과는 상반되는 측면이 비쳐지기는 하지만 그러한 평가가 인조반정을 성군을 쫓아낸 반란으로까지 평가가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특정정치집단을 선호한 것은 단지 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물론 전제군주가 여러 정치집단을 이해하며 균형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광해군이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정치적 흠결이 될 뿐, 그가 왕위에 쫓겨날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1596년에는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나는데 아무래도 광해군이 탐탁치 않았던 선조이기에 광해군은 오히려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광해군을 지지해준 것은 바로 대북파입니다. 따라서 그가 대북파를 지원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모습을 아닙니다. 어쩌면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위해서 그러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창대군이 제거되었는데 여기에는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시 대북일파는 박응서 등에게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거짓자백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반역죄로 사사되고 영창대군도 폐서인된 후 강화도로 유배된 것입니다. 그리고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당시 강화부사 정항이 온돌을 뜨겁게 달구어 영창대군을 증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인조실록에는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별장 이정표가 음식물에 잿물을 넣어 영창대군을 독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살해한 방법에는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그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전제군주로서 잔혹한 면을 살필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 어린 동생을 제거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한 것입니다. 그럼 인목대비는 어떤 인물일까. 
인목대비는 1575년에 태어났으며 선조비로 책봉된 것은 1602년,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고 광해군의 나이는 28세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고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소북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인목대비에 폐모 논의도 나왔습니다. 1613년에는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이위경의 상소가 나왔고 이어서 정조, 윤인의 상소가 이어졌습니다. 이위경은 “인목대비는 저주사건을 일으키고 역모에 연결되었으니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끊어졌다. 전하는 비록 대비와 모자관계이지만 인목대비에게 현저한 죄악이 있으니 종사를 생각할 때 신하의 입장에서 국모로 대우하기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결국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연금되었으니 이를 주도한 것은 대북파가 주도한 것이요, 대북파의 정치적 횡포를 광해군은 암묵적으로 지지한 것입니다. 광해군이 만약 인목대비를 유폐하지 않았다면 인조반정을 막을 수 있었을까. 사실 성리학적 질서를 중요시하는 조선에서 왕이 대비를 폐모를 시도한다는 것은 커다란 약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광해군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민생을 포함한 어떤 정치적 분야와도 관련없는 인목대비 폐모사건은 그저 정치적 보복으로밖에 볼 수 없고 폐모는 폐륜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북파의 대한 무한 신임은 광해군 스스로가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창구를 일부 닫아버리는 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대북파 뿐만 아니라 여러 당파들을 아우르는 정책을 시도했다면 적어도 반정의 낌새를 눈치채고 반격이라도 하는 역사를 진행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대비를 스스로 하지 않은 광해군은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의 희생양의 되어야 했습니다.

인조반정의 명분

때는 1623년 3월 12일 밤이었습니다. 홍제원 근처로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바로 반정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반정군에 합류한 것은 바로 능양군이었습니다. 김류를 총대장으로 한 반정군은 세검정과 창의문을 거쳐 돈화문에 이르렀고 훈련대장 이흥립과 내통하던 반정군은 창덕궁 함춘원 숲을 불을 지르는 것으로 반정의 성공의 표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정세력에는 이이와 이항복, 문이인 김류, 이귀, 김자점, 신경진, 이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더불어 위에서 언급한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반정군의 급습으로 광해군은 담을 넘어 안군신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그 집에서 일하는 정담수의 고변으로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물러나고 새로운 왕이 옹립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반정이 성공된 것입니다. 
‘적신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악행으로 임해군을 해치고 영창대군을 죽이며 조카(능창군)를 죽이는 등 여러 차례 큰 옥사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다. 또 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가 하면 의리로는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은 명에 대해 배은망덕하여 소긍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이에 능양군이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종묘와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반정을 일으켰다.’ 『인조실록』
이 일로 광해군 집권기에 실세로 활약하며 옥사를 주도했음 폐모살제에도 적극 관여한 이이첨 등이 처형되었습니다. 그럼 인조는 누구였을까. 그는 반정을 이끈 능양군으로 선조의 첫 번째 손자로 태어났습니다. 특히 한고조 유방처럼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어 할아버지 선조는 ‘한 고조랑 같은 상이니 누설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수가 적고 조용한 사람이었으며 상소문에 왕이 직접 답을 내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때에도 내시에게 베껴 쓰게 하였습니다. 혹시 모를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인조반정을 일으킨 명분을 반정교서에는 36가지에 달하는 항복이 나열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지나친 토목공사를 하여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는 내용도 있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바로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과 폐모살제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새문동 궁에 왕기가 있다는 말을 매우 싫어하여 그 집을 부수어 치워버리고 새 궁을 지었는데 아주 굉장하고 화려하였다. 그 집 이름을 경덕궁이라 하여 왕기를 눌렀다. 인조는 정원군의 맏아들로서 반정하고 정원군을 추숭하여 원종이라 하였으니 왕기가 있다는 설은 참으로 기이한 참언이었다.’ 『연려실기술』
이 외에도 역모에 관한 상소가 꾸준히 올라왔으나 광해군은 잔치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김개시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이 왕세자 때 그를 모시는 궁녀로 들어온 김개시는 뛰어난 미모를 지니지는 않았으나 광해군에게 궁궐 내에서 떠도는 중요한 정보를 주어 마음에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당시 김개시는 이이첨과 추문이 떠돌았으니 그만큼 가까웠다는 이야기고 따라서 중요한 정보를 잘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김개시가 역모상소가 올라올 때 그건 단지 풍문이라며 일축합니다. 한편 야사에서는 반정 당일 연회를 주최한 김자점이 김개시에게 미리 뇌물을 주고 거사 때 잘 처신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반정 당일에 처형당했다고 하니 확실한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중립외교였다면 명나라에서는 인조반정을 반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의 역사서에는 인조반정을 ‘혁명’이 아닌 ‘찬’이라고 표현하였으니 인조반정을 왕위찬탈로 본 것입니다. 명나라는 인조의 왕위 책봉을 반대했고 명나라조정에서는 다시 광해군을 왕위에 올려야 하며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적어도 광해군의 외교는 실리적이었으며 후금이 압박해오자 그제서야 명은 인조를 책봉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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