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는 왜 왕이 되지 못했을까.

2023. 3. 8. 09:3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728x90

 

1982년 서울에서 사도세자를 죽음에 몰게 한 도구 뒤주가 공개되었습니다. 2백 20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이 뒤주는 가로 110cm, 세로 70cm, 높이 105cm의 크기에 3cm의 두께의 판자와 12cm 두께의 기둥을 사용했고 길이 20cm 직경 5cm의 큰 자물쇠를 채워놓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물건을 소장하고 있던 데에는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리씨가 세자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여 친정집으로 세자가 사용하던 삼학경상과 놋대야와 함께 옮겨 보관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해당물건을 보관해온 집안에서는 매년 정초에 집안에서 뒤주 위에 경상, 경상 위에 물을 가득 채운 놋대야를 올려놓고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왔다고 합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있으면서 죽을 때 얼마나 목이 몰랐을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지난 2000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영조 때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지는 과정을 담은 ‘임오일기’진본이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이 책은 1762년의 일들을 기록한 책으로 승정원 주서인 이광현의 일기가 5월 11일부터 21일까지 사도세자가 죽는 과정을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13일 진시(辰時·오전 7∼9시)부터 초경(初更·오후 7∼9시)까지가 일기의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기사에서 영조는  창덕궁 휘녕전 뜰에 널빤지를 펴게 한 뒤 사도세자를 엎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칼을 빼든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그러면 세자의 이름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에 사도세자는 부자관계는 하늘이 정해준 관계인데 어찌 아버지 앞에서 흉한 꼴을 보이겠느냐며 궁궐 밖에서 자결하겠다고 맞섭니다. 그리고 사도세자는 한차례 자결을 시도하다 실패하였고 이를 명한 영조를 말리던 신하들이 줄줄이 파직되었습니다.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넣고 직접 널빤지를 대고 대목을 박은 뒤 새끼줄로 다시 묶어 뒤주를 봉하였습니다. 
그보다 1년이 앞선 1999년에는 비운의 생을 마감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이 250년 만에 공개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어제 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이라 하니 영조가 직접 쓴 글입닌다. 실제로 이러한 묘지문은 뛰어난 학자가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영조가 직접 쓴 것으로 이 묘지문에서 그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배경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성군이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워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면서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두게 되었는지를 토로한 것입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때는 임오년 여름 윤5월하고도 21일이라“

그러면서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것을 정말 아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훈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진실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랬으나 9일째에 이르러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의 병은 격간조동지후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슴이 뛰고 답답해 조급하고 망령된 행동을 이르는 말로 세자의 장인이자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홍봉한은 병같지 않은 병에 걸렸다고 비꼬았습니다. 어찌되었든 당시 사도세자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였으며 그러한 것은 궁녀나 내시를 함부로 죽이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기녀나 여승을 희롱하기도 하였고 안암동의 기생집을 찾기도 했습니다. 특히 사도세자의 기행에 대해서는 그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적은 『한중록』에서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도세자가 심각한 광증을 앓았다고 하며 사람을 보면 이유 없이 불안하고 가슴이 두근대는 경패증, 천둥소리를 몹시 두려워하는 뇌벽증,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없는 의대증을 앓았다고 합니다. 사도세자는 자살을 시도했으며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지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증세는 혜경궁 홍씨만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그의 불안한 증세는 그가 장인인 홍봉한에게 직접 쓴 편지에서도 발견되기도 하였으니 ‘열은 높고 울화는 극도에 달해 마치 미칠 듯 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더불어 상의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 바로 관서유람순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일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일이 알려진 계기가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영조의 마음에 안들었던 것도 있지만 사도세자의 아버지의 명을 어기기도 했으니 그것은 바로 금주령입니다. 영조는 즉위 초반에 무신난을 겪었고 생모인 숙빈 최씨가 신분이 천한 나인출신이라 영조는 스스로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트집잡히지 않는 모범적인 근주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모든제사에서 예주(醴酒)를 쓸 것이며 모든 술은 금지하고 위반자는 엄벌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주는 일종의 감주로 알코올 성분이 거의 없는 맹숭맹숭한 맹물과 같은 무늬만 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술을 마셨으니 낙선당에서 술냄새 풍기며 공부하다가 영조에게 걸린 것입니다. 사도세자는 이 공간에 불을 지르기도 했는데 조선시대 소방수인 급수군이 불을 끄자 했지만 영조는 냅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영조의 외면을 받은 그는 다른 것에 몰두합니다. 그것은 바로 『무예신보』라는 병서편찬입니다. 그만큼 사도세자는 무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15세 때에는 청룡언월도를 자재로 썼다고 하며 이 검은  실전에서는 그 사용이 어려울 만큼 크고 웅장한 무기라고 합니다. 그러한 무기를 썼을 정도로 사도세자는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써낸 『무예신보』는 기존의 『무예제보』에 12가지 기예를 더 넣어 편찬한 무예서로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것으로 보면 사도세자는 무예 방면에 상당한 소질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왕실에서도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영조는 세자가 문무를 겸비했으면 했는데 사도세자가 무쪽으로 강했던 사도세자가 못내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사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대리청정시키기도 했는데 그 기간이 무려 13년 5개월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신들이 청을 했을 때 그대로 하라고 하면 영조가 따로 불러 곧이 곧대로 다 들어주냐고 질책하고 이런 게 아니구나 해서 다음에 신하들이 청을 올렸을 때 ‘그건 아니 되니 이렇게 하시오’라고 하면 대신들의 말을 안듣는다고 영조가 나무랐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경언의 고변사건’입니다. 고변자 나경언은 액정별감(掖庭別監) 나상언(羅尙彦)의 형으로 형조판서 윤급(尹汲)의 청지기였습니다. 그런 그가 왜 고변하게 되었을까. 당시 세자는 김상로와 홍계희 등을 싫어했는데 두 사람은 세자를 제거할 뜻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후궁 문소의와 세자의 동복인 화완옹주도 가담했는데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입궁하고 나서 그의 아우 김구주가 김상로, 황계희 등과 결탁, 영조를 이간시켜 경운공으로 이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나경언을 사주하여  “세자가 일찍이 궁녀를 살해하고, 여승을 궁중에 들여 풍기를 문란시키고,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양에 미행했으며, 북성에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영조는 격노했고 그리고 고변자 나경언을 충직한 자로 받아들여 살리려 했으나 세자를 모함했다는 대신들의 의견에 밀려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세자의 비행문제가 확대되어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결을 명한 영조의 마음을 굳게 하는 조언이 있으니 바로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말입니다.
‘세자가 사람을 죽인 것이 거의 100여 명에 이르며, 불리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지나번 창덕궁에 갔을 때는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비록 제 몸은 돌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