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2023. 4. 11. 15:4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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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행렬도

일본막부시기에 조선에서 파견한 외교사절단을 조선통신사라고 하며 이 때 ‘통신(通信)’이란 ‘신의를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러한 통신사 이전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이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난리는 끝이 났지만 조선은 이미 황폐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에 양국은 사이가 안좋게 지낼 줄 알았지만 이웃나라인 만큼 아에 교류를 안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으로 출병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사명대사 유정과의 교섭을 통해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이 조선의 사절단을 초청한 이유는 일본 바쿠후에 대한 좋지 않았던 민심을 돌리기 위함에 목적이 있었고 그리고 조선에서 온 사절단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바쿠후에 예를 갖추는 모양새를 보이게 하여 그들의 위엄을 높이려는 의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한편 조선입장에서도 이러한 통신사 행렬을 통해 일본의 동태를 살필 필요가 있었습니다. 

조선통신사 행로

이러한 사절단의 첫 번째는 1607년의 회답겸쇄환사라고 불린 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애초에 이들의 목적은 대중들이 알고 있는 문화사절단의 모습이 아니라 일본이 보낸 국서에 회답하고 전쟁 때 잡혀간 포로 송환을 주된 임무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 14년인 1636년 네 번째 사절단부터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렇게 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열 두 차례 이어졌으며 이를 사행(使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조선 임금 명의의 국서와 함께 공식 외교문서 서계(書契) 그리고 일본에 줄 선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들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 그리고 배를 타고 일본 쓰시마, 아카마가세키를 지나 오사카에 상륙하고 교토와 나고야를 거쳐 에도에 이르렀습니다. 대략 2000㎞에 이르는 거리였으며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반 동안에 해당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긴 기간 동안 가야하는 길은 마침 고행 길과 같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일행에 포함되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조선통신사는 주로 사찰로 이동해 잠을 청했으며 이들을 다 수용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임시로 가옥을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사절단 사이에는 좋은 방을 잡기 위한 실랑이가 당연시되었으며 친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 방을 같이 쓰기 위하여 방패를 몰래 바꿔 걸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선비들은 일본인들보다 체격이 컸으므로 더 좋은 가마를 타기 위한 그들 간의 경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조선통신사가 오고갈 동안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평화가 이어졌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1624년의 사행길은 포로를 돌려받기 위함이 목적이었는데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2~3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통신사를 따라 조선으로 온 조선인들은 10분의 1에 불과했는데 이미 정착한 조선인들도 있었고 각 번에서 조선인들에게 송환소식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포로송환의 임무를 띠었던 통신사의 임무는 이후 문화사절단으로서 바뀌어가게 되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사행단의 경우에는 책에서 보았던 것을 경험하는 성격이 강했던 방면 당시 일본은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따라서 조선인의 호기심도 자극했고 사절단에서 제술관이나 서기 등의 역할을 담당했던 서얼이나 중인들은 이러한 일행에 섞여 일본으로 가 조선에서 느낀 자신들의 답답함을 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사대부중심의 문학창작에서 중인과 역관으로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출발한 이들이 일본으로 12번 왔다갈 동안 일본국왕사가 1606년부터 1622년 사이에 딱 5번 있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많았습니다. 그나마 일본국왕사가 한양에 온 것은 딱 한 번 뿐이며 나머지는 부산까지만 왔다갔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전쟁의 아픔이 있어서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이 조선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선통신사


일본에서 조선사행단의 인기는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갈 때면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시를 가지고 온 자, 필담을 나누러 온 자, 그리고 구경하러 온 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보기 위해 새치기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른바 조선판 한류였던 셈입니다. 당시 이들에게 선물공세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군자는 사람을 덕으로 아낀다,’며 일절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그렇게 조선통신사에 관심을 보였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당시 일본에서는 쇄국체제 하에서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고 따라서 많은 일본 지식인들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갈망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방문한 조선통신사는 이러한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통신사 일행이 지나는 곳마다 그 지역의 지식인들은 함께 유교에 관한 필담을 나누고, 한시를 읊기를 청하였으며, 때로는 그림이나 글을 요청하고 학문상의 의문점을 물은 것도 아마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통신사들의 기대치는 당시 기록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관사에 도착하자 접대 책임자와 그 지방의 집정으로부터 심지어는 말을 돌보며 심부름하는 일본인, 유학자와 승려에 이르기까지 종이와 벼루, 먹을 가지고 와서 날마다 글과 글씨를 요구했다. 글씨를 부탁하는 자를 내쫓았지만 그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글씨를 배운 적이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붓을 휘둘러 써줄 수밖에 없는 고역을 치렀다.’『동사일록』
‘200, 300리 떨어진 곳에서 와 5,6 개월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글을 써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낙담할까. (…) 매일 시르 짓는 데 닳아버린 붓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일동장유가』
‘일본인이 깃발에 쓴 문자라든가 병풍에 쓴 문자, 혹은 쪽지에 가늘게 적은 글이라든가, 문사들이 족자에 적은 글을 보면 필법이 기묘하다. 그런 때문인지 일본인은 우리나라 사람의 글을 얻으면 해서체든 초서체든 우열을 묻지 않고 껑충껑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해사일기』
따라서 일본도 이러한 조선통신사 행렬에 융숭하게 대접하였으니 바쿠후는 500명이나 되는 통신사 일행들을 거의 200일 가량 대접하면서 1년 예산인 100만 냥 정도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비는 각 번의 다이묘들에게 부담시키면서 다이묘를 통제하여 체제를 안정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것은 바로 마상재라는 것으로 이는  달리는 말 위에서 펼치는 기예로 마상립(馬上立)·마상도립(馬上倒立)·마상도예(馬上倒曳)·마상좌우7보(馬上左右七步)·마협은신(馬脇隱身)·쌍마(雙馬)·횡승(橫乘)의 일곱 종류 이상의 곡예를 일본인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이 마상재는 당시 에도막부 최고의 권력자 쇼군을 비롯하여 다이묘(大名, 대영주)·관리·지식인·서민에 이르기까지 관람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명예로서 멀리서나마 한 번 보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대표적인 문화교류였습니다. 특히 사료에서는 쇼군이 직접 관람하는 마상재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조선통신사행 파견 이전에 미리 마상재인과 말을 출발시킬 것과 여분의 말을 준비시켜 보낼 것을 신신당부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마상재인은 1635년에 일본의 간청에 의해 장효인과 김정이 사절단에 섞여가서 선보인바 그들의 공연은 일본을 열광시켰습니다. 이후로 이러한 마상재인은 꼭 동행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이러한 마상재를 모방해 다이헤이본류라는 승마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10월에는  통신사의 행렬을 그림이나 기행문 등으로 기록하는 등 파생된 문화 교류가 많아 가치가 높다는 것이 인정되어 조선통신사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공동 등재를 추진하여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통신사도 계속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에서는 신도(일본 고유의 민속 종교)를 중시하고 일본의 고대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국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조선통신사의 행렬은 1811년이 마지막이었고 이 때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에서는 메이지정부가 들어서면서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조선통신사로 조성된 평화분위기는 다시 한 번 긴장의 관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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