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에는 어떻게 조세를 옮겼을까.
2024. 6. 9. 07:0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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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조세는 국가 재정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국가와 사회 운영에 매우 중요합니다. 또 조세 제도는 각 사회의 역사, 문화, 경제 상황 등을 반영한 역사적 산물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전통 사회와 현대 사회는 조세로 납부되는 물품이 다릅니다. 각 사회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조세 제도의 내용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조세 물품이 돈(화폐)인 데 반해 전통 사회에서는 곡물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통 사회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고, 농산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생산 물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나라 중세 사회에서 조세 제도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 무엇보다 당시의 토지 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사람들은 토지를 경작해 생산한 곡물의 일부를 전조라는 이름의 세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전조는 토지 수확량의 일정 비율을 국가나 수조권자에게 바치는 것으로 공전(公田)의 조(租)는 국고에 수납되었고, 사전의 조는 사전주가 취득하였습니다. 고려 시대에 공전의 조율은 4분의 1(또는 10분의 1로 보기도 함.)이고, 사전조는 2분의 1이었습니다. 주로 쌀이나 콩을 비롯한 잡곡으로 세금을 냈지만 이런 곡물 대신 베나 은으로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의 각 행정기구를 통해 수취된 군현의 각종 세공물은 조운에 의해 중앙의 경창으로 운반되었습니다. 육로를 통해 세곡을 운반하는 것은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연안 해로를 이용하거나, 내륙까지 통해 있는 수상 교통로를 이용하는 것이 더욱 수월했습니다.
각 지방에서 조세의 명목으로 납부하는 곡물을 조창에서 수납한 다음, 선박에 적재하여 수운으로 중앙의 경창에 운송하는 제도인 조운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고려사』 식화지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조운제도는 건국 초기부터 12조창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조창은 조세곡을 수납하여 모아두는 곳이며, 조창이 위치한 포구에서 조운선에 세곡을 선적하여 경창으로 운반합니다. 그러나 국초부터 12개 조창 모두가 한꺼번에 운영되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고, 각 조창별로 설치시기에 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992년(성종 11)에는 전국 60개 포구에서 개경까지 세곡을 운송하는 수경가(輸京價)가 제정되었습니다. 즉 당시에는 수경가가 지정된 60개 포구가 주변 지역의 조세를 수납하여 세곡을 운반하는 조창의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수납한 세곡은 조운 때까지 일정기간 조창에 보관되었습니다. 조운에는 기한이 정해져 있어서 가을 수확을 거친 후 다음해 조운하여 가까운 지역의 경우 2월까지, 먼 지방은 4월까지 경창으로 수송을 마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농번기를 피하고 계절의 기후를 감안해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창으로 옮겨진 세곡은 포로 운반되었는데 고려 시대 때 운영하는 포는 60개에 달했습니다. 내륙의 한강 연안과 충청‧전라‧경상 3도의 해안에 분포되었으니 세곡 운송이 한강의 수로나 남‧서해의 연안 해로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운선은 고려, 조선시대에 각 지방의 세곡을 수도로 옮기는 데 사용했던 배입니다. 그리고 조운업을 시작한 것이 문헌으로 남은 것도 고려 때의 일입니다. 고려의 조운업은 중국보다는 늦지만 중국의 조운업은 강과 내륙수로를 사용했으며, 해양을 통한 조운업은 한국이 빠르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조운선은 초마선(哨馬船)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때부터 한 척당 무려 1,000석(섬)의 곡식을 적재할 수 있었습니다. 한 섬은 현대 용량단위로는 180 리터, 재래식 무게단위로는 곡식마다 다른데 벼는 200kg, 쌀은 144kg, 보리쌀은 138kg로 당시 조선기술 수준에 1,000석이면 상당한 양의 곡식을 수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도량형의 단위는 시대에 따라 다른데, 고려시대 1석(섬)의 부피는 약 51L, 조선시대로 오면 약 114.5L쯤 됩니다. 고려시대 초마선은 1000석을 실었을 때 대략 52.9톤쯤 됩니다.
고려시대 조운을 통하여 수송되는 세곡의 최종 도착지는 개경에 위치한 국영 창고인 경창입니다. 고려시대 개경의 경창으로는 좌창과 우창, 대창(大倉), 용문창(龍門倉), 운흥창(雲興倉), 신흥창(新興倉) 등이 있습니다. 좌창은 광흥창(廣興倉), 우창은 풍저창(豊儲倉)이라고도 하며, 좌창의 별창(別倉)으로는 동강창(東江倉)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창까지 가려면 정해진 항로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고려 때의 해안 항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조선 시대에도 그 길을 그대로 따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운을 바다로 옮기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농번기도 피해야 하고, 기후의 변화에도 대처해야 했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곳곳에 암초가 있는 해안 때문에 곳곳에서 사고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강화도의 손돌목은 삼남지방에서 거둔 세곡을 실은 배가 통과하는 곳으로 배들은 손돌목 밖에서 만조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암초를 만나 배가 부딪힐 수 있었습니다.
고려 때 가장 사고가 자주 일어난 곳은 안흥량 앞바다였습니다. 이곳은 현재 충남 서산군의 팔봉면과 태안면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해안선이 복잡하고 간만의 차가 커서 파도가 거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은 ‘난해량’이라 하였는데, 즉 ‘지나가기 힘든 곳’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운하를 구상하게 되었고, 운하 얘기가 처음 나온 건 1134년 고려 인종 때였습니다. 인종은 내시 정습명을 내려 보내 인근의 장정 수천 명을 동원해 운하를 파도록 했다가 바로 포기했습니다. 땅이 단단해서 파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도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조운선들이 계속 침몰하자 1412년 태조 이성계의 아들 태종이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이러한 조운선은 중요한 세곡을 실었고 앞뒤로 군선이 호위했습니다. 배의 선장을 초공, 노잡이는 수수, 일꾼은 잡인이라 불렀습니다. 각 창고의 책임자는 개경에서 파견 나온 판관이었으며, 재고파악과 입출은 그 아래 향리 신분인 색인이 담당했 다. 그 밖의 일꾼들은 군현민보다 신분이 낮은 천민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조운선에 세곡선을 싣고 2월부터 개경으로 수송하는데 보통 1천여 척이 넘는 조운선이 예성강 하구까지 줄을 잇는다고 합니다. 곡식의 수송은 5월이나 되어야 끝났습니다. 그 외에도 젓갈, 도자기, 지방 향리들의 뇌물, 선물 등을 실은 조운선도 수시로 개경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제도도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13세기 후반 진도와 제주도에 거점을 둔 삼별초가 고려 정부에 항쟁하면서 고려의 조운제도 운영에 위협을 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기 수십 년간 지속된 왜구의 침략은 남해와 서해의 연안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고, 고려의 조운제도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1376년(우왕 2)에는 선박을 통한 조운의 운영을 중단시키고, 육지로 세곡을 운송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지가 많고 도적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육운(陸運)의 방식도 세곡의 안정적인 운송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래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그 규모 자체가 상상초월이었기 때문이었고, 우왕 대에는 조운선 운영 자체가 중단됩니다. 일례로 1354년 4월, 왜구는 전라도의 조운선 40여척을 노략질 했습니다. 허나 이런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볼 수 없는데, 고려 장수들의 전공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승전했다는 기록은 없고 그저 몇몇 포로를 바쳤다는 식의 기록만 있을 뿐입니다. 상황은 계속 심해져서, 다음 해 1355년 4월에 이르면 왜구는 전라도의 조운선 2백여척을 약탈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조운선이 2백여척이나 약탈 당할 정도면 사실상 조운을 이용한 세미 확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왜구의 침략 위협에 놓여 있으면서도 세곡 운송의 가장 효과적인 방식인 조운제도를 포기할 수 없었던 만큼, 여말선초의 시기에는 조운제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안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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