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표예술품 고려청자
2022. 8. 31. 20:3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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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꽃, 연주의 차, 촉 지방의 비단, 정요 백자, 고려 비색은 모두 천하 제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따라하고자 해도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수준의 것들이다.” -수중금-
이 글은 중국송나라 학자인 태평노인의 저서 『수중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문장에서 우리의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고려비색이라는 단어입니다. 고려비색은 바로 고려청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송나라학자는 고려청자를 천하제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자는 3세기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선종이 유행하면서 선종승려들이 청자에 차를 따라 마시게 되자 청자의 생산이 확대되고 보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라말기에 선종의 유행과 더불어 차를 마시는 의식이 중요해지면서 고급찻잔의 수요가 늘어난 것입니다. 바로 이 때 고급찻잔 중에 상당수가 청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청자를 만들 기술이 없어 수입에 의존했습니다.
9~10세기 무렵에 우리나라에서 청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데에는 청자순화 (靑瓷淳化) 4년 명문(銘文) 항아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음각으로 순화사년계사(淳化四年癸巳) 태조제일실(太祖第一室) 향기장최길회조(享器匠崔吉회造)라는 글씨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자기의 제작연대가 고려성종 12년 즉 993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렸습니다. 그리하여 일본학자들은 10세기 말경에 한국의 청자가 등장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후 발굴이 계속 이루어지면서 9세기부터 자체적으로 녹유청자기술에 중국의 기술이 결합되어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해무리 굽청자로 불리는 일군문 계청자가 만들어졌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장보고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신라시대부터 그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고 제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체 생산된 청자들은 일본에 다시 수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자기들은 청해진과 고령토 산지인 강진에서 생산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고려왕조가 들어섰고 벽란도를 통한 대외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청자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습니다. 고려 건국 무렵 당시 중국의 주요 청자 생산지는 남부를 지배하던 오월이었는데 10세기 후반 송에게 멸망당하면서 많은 청자장인이 고려로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경기도 용인 등지에 가마를 만들고 청자를 구웠으며 이후 11세기말까지 관요가 강진과 전북부안일대에 형성되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청자의 질, 형태, 문양들이 발전하였으며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6대 예종부터는 고려청자의 기본 틀이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7대 인종부터는 고려 특유의 비색청자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이 후 상감비법이 등장하는가 하면 철채상감, 철채백퇴화, 철유상감 등의 기법 등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서 고려 특유의 비색과 부드러운 선의 형태와 힘찬 문양이 합쳐져 12세기에 고려청자는 절정을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13세기에 무신의 난과 몽골의 침입을 겪으며 고려의 기형이 둔해지고 굽이 커졌으며 비색이 어두워지는 등 점차 고려청자는 퇴보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적 혼란이 예술성의 후퇴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분청사기로 자기의 유행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비색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일단 청자라는 것이 당시로서는 중국과 고려만이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고급기술로 만들어진 것이 청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청자의 특징은 바로 비색입니다. 이 비색은 청색도 아니면서 녹색도 아닌 그런 오묘한 빛깔로 이러한 비색은 고려청자의 독특한 정체성이 되었고 이어 자기에 붉은 색은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철화청자(철분 안료로 그림을 그린 후 산화염으로 소성해 문양을 검은색으로 발색시킨 청자), 철채청자(태토 위에 검은 안료인 철사를 칠하고 유약을 발라 검게 발색된 청자), 진사채청자(적색 안료인 진사로 문양을 그린 뒤 환원염으로 소성해 선홍색으로 발색된 청자), 화금청자(금으로 채색한 청자) 등이 등장하여 우리나라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 도자기 역사에서도 큰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도자기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이라고 하는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도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드린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송나라의 사신 서긍이 기록한 책 『선화봉사도경』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고려 비색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당시 고려청자의 기술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바로 고려만의 비법인 삼감비법이 등장한 것입니다. 겉면에 홈을 파고 그 곳에 다른 재료를 넣는 기법인데요. 이렇게 하여 비색의 바탕에 흰색이나 검은 색의 무늬가 들어간 청자, 즉 상감청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장인들은 청자라는 송나라 자기술에 고려인의 비법이 더해져 당대 최고의 도자기를 만든 것입니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청자로 중 하나인 청자 운학문 매병은 일본 도굴꾼이 강화도무덤에서 훔친 것입니다. 그 무덤은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2대 집권자 최우의 것으로 구전되어왔습니다. 따라서 1232년, 몽골의 재침입에 대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최우가 사망하자 무덤에 이 도자기가 함께 묻힌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이 도자기를 도굴한 야마모토는 여러 손을 거쳐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에게로 6000원의 가격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 도자기를 산 사람은 간송 전현필로 20000원을 건넸습니다. 이 금액은 서울에서 기와집을 20채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이 도자기는 천학매병이라고 불렸습니다. 학은 69마리지만 마치 1000마리의 학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것 같다하여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한편 이 도자기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의 수집가 무라카미가 4만원을 제시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이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높이가 약 42cm, 밑지름 16.5cm로 폭과 높이, 굽의 비례가 수학적으로 완벽한 황금비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넓고 당당한 어깨에 밑으로 내려가며 매끄럽게 좁아졌다가 바닥으로 가며 다시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모습은 우리가 절대적인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 장인들의 독보적인 기술인 비색과 상감기법이 잘 표현된 청자로 42개의 이중 원 안에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학이 표현되어 있는데 13세기에 이러한 문양을 그렸으므로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을 13세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고급스런 이미지이지만 그렇다고 고려청자는 귀족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고급청자는 상류귀족들의 부장품이나 진상품, 장식품으로 쓰였고 조질청자는 지방귀족이나 하급귀족들의 생활용품으로 쓰였습니다. 조질청자는 소품종을 대량생산한 자기로 색깔도 비색보다는 녹갈색에 가깝고 비색청자에 비해 표면도 거칠엇습니다. 그것은 1983년과 1984년에 완도 앞바다에서 인양된 3만 여점의 청자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 처음에 이들 자기들이 조잡하다는 이유로 초기청자로 알려졌으나 조사결과 청자 제작의 12세기의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고 따라서 지배층의 요구에 따라 비색청자가 소량 생산되고 생활자기를 원하는 수요자들에게 대량생산한 청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고려청자들이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일제를 거치면서 많은 고려 청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고려청자 수집광이었고 당시 일본 관료, 학자들이 고려청자를 일본으로 빼돌렸습니다. 고려청자의 진가를 이 땅의 후손들이 많이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시의 청자기술이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 자기를 재현하지 못한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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