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대한 오해와 진실

2022. 8. 29. 20:31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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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어느 날 인종의 귀에 태자태보가 사직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당시 태자태보는 김부식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습니다. 한 때 권세가로 이름을 드날린 김부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부식은 묘청의 난도 토벌한 바 있었습니다. 당시 그의 보좌관은 윤언이란 사람이었는데 토벌하는 과정에서 사사건건 김부식과 부딪혔습니다. 김부식은 윤언이를 죄를 물어 탄핵하는 바람에 윤언이는 지방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인종이 윤언이를 사면하면서 그가 조정에 돌아올 것이란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이 즈음되니 김부식이 이러한 일 때문에 벼슬에서 물러나는 건 아닌가 인종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김부식의 뜻을 꺾을 수 없던 인종은 그에게 동덕찬화공신이라는 칭호를 내리며 사직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바로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설화같은 이야기들은 뺐는데 철저히 사실 위주의 역사서를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왕명을 받아 1145년에 책이 완성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이 책은 신라가 12권, 고구려가 10권, 백제가 6권으로 구성되었고 이 외에도 「지」, 「연표」, 「열전」까지 합하여 50권에 달하였습니다. 유교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한 이 책은 신라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고기, 삼한고기, 신라고사, 삼국사(구삼국사), 김대문의 고승전·화랑세기·계림잡전, 최치원의 제왕연대력 등과 국내문헌과 함께 삼국지, 후한서, 진서, 위서, 송서, 남북사, 신당서·구당서, 자치통감 등의 중국문헌도 참고로 채택되었습니다. 「본기」에서는 고대 국가들의 왕들의 통치내용들이, 「지」에는 법규에 관련된 내용들이, 「연표」에는 삼국의 왕들의 집권했던 시기를 서로 비교하여 서술해 놓았습니다. 「열전」에서는 총 69명에 달하는 인물(을지문덕, 박제상, 온달, 계백, 연개소문, 궁예, 견훤 등)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10권 중 3권은 김유신에 대한 이야기로 채웠습니다. 이와 더불어 삼국을 포함한 28개국 사이에서 벌인 440회에 달하는 전쟁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930여 회의 자연변이도 기술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논찬으로 달아 부연설명해 놓았는데요. 내용은 유교적 사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후대에 걸쳐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사연구초>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실었습니다.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 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곱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中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진취적 운동이었으나 이 난을 진압당하는 바람에  자주성이 퇴색하고 보수적이고 사대적인 문화가 고착화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앞장섰던 김부식의 『삼국사기』 역시 그와 비슷한 비판이 뒤따랐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대해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 실상은 낭불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라고 덧붙이며 김부식을 유가와 사대당 그리고 보수사상의 대표주자로 인식하였습니다. 실제로 김부식에 대한 그러한 평가가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금나라를 송나라를 압박하여 북송을 무너뜨리고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절대 강자로 들어선 시기였습니다. 당시 김부식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는 보지도 못하고 금나라가 화북지역을 차지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입장에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만큼 무모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김부식이 실제로 사대주의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를 진압하는 과정을 통해 김부식을 보고 사대주의자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무리감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그의 저서인 『삼국사기』마저 사대주의적인 역사서라고 너무 한 쪽 방향으로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사기에 대한 비판은 현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있었으나 그 내용은 판이하게 달랐다.

 사실 삼국사기에 대한 지적은 신채호가 지적하기 이전 시대인 조선시대에도 있어 왔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삼국사기를 바라보는 시각은 신채호와는 달랐습니다. 조선시대 학자들이 바라본 『삼국사기』는 유교적인 명분론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본기라고 하였습니다. 본기는 왕들의 기록물로서 남긴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는 왕에 대한 것은 제후로 기록되는 ‘세가’로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김부식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황제국가로 바라보았단 것입니다. 조선의 학자들이 보기에는 당시 중국이라는 황제국이 있었으므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세가로 기록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는 이 책이 너무 신라중심으로 쓰여져 있다고 비판합니다. 사실 신라에 대한 내용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양만 비교해서 오는 오류입니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 신라 중 가장 오래 존손된 국가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발해가 건국되면서 남북국 시대가 열리기 전 삼국이 존재했을 때만 비교하면 오히려 고구려에 대한 내용이 제일 많습니다. 신라중심으로 서술되었다는 비판은 합당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른 쪽에서는 삼국사기가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와 발해의 역사를 빠뜨렸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이름은 『삼국사기』입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세 개의 나라에 대한 역사를 서술한 책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와 발해의 역사를 기술하고 안하고는 『삼국사기』란 책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의 문제이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누락한 것으로 보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이 지은 『사기』는 상고의 황제로부터 전한의 무제까지 2천 수백 년에 걸친 통사(通史)입니다. 반면 『삼국사기』는 엄밀히 따진다면 통사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또한 삼국은 오래 된 왕조인데도 그것을 기록한 역사서가 없다. 물론 『구삼국사』, 『삼한고기』, 『신라고기』 등이 있으나 문장이 거칠고 중요한 일들이 빠져있어 정확치 않다. 해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이것이 바로 『삼국사기』의 편찬목적입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의 사실적 서술에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국사기』는 삼국의 시대를 정리한 시대사인 셈입니다. 따라서 고조선의 건국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비판받아서는 안됩니다. 
 김부식은 되도록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적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의견이 들어간 부분도 있지만 어떤 역사서도 자신의 의견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100% 사실만을 기록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은 없습니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너무 편협한 시각으로 『삼국사기』를 바라본다면 이 책에 대한 정당한 가치마저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우리 고대사에 붙은 물음표는 더 많았을 지도 모릅니다. 후대를 위해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한 것은 김부식에게 고마워해야하는 부분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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