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변은 왜 일어났나
2022. 8. 28. 20:2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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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문신에 비해 무신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 일례로 김돈중과 관련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인종 22년인 114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내시직에 임명되어 왕의 총애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던 섣달 그믐날 궁궐 안에서 놀이가 벌어졌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무신 정중부를 불렀습니다. 김돈중보다 정중부가 벼슬직은 높았지만 그를 함부로 부르며 그의 수염을 칭찬하였습니다. 김돈중은 그러면서 촛불을 수염 밑으로 들이밀고는 태우려 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정중부는 불을 끄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면서 후려치니 김돈중이 나가떨어졌는데요. 근처에 있던 무신들이 정중부에게 모여들었고 그제서야 사태가 심각함을 알아차렸습니다. 정중부는 무신이었기 때문에 문신인 김돈중을 때린 것은 부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문신을 우대하던 고려정치계에서 김돈중이 문신이고 정중부가 무신이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김돈중의 아버지가 바로 김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원인은 김돈중에게 있었음에도 정중부가 난감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김부식은 정중부를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임금 의종은 이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후 김부식은 세상을 떠났고 세월도 꽤 흘렀습니다. 그 시간동안 정중부는 김돈중에게 당한 일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럼 고려는 여기서 무신에 대한 처우가 고려건국초기부터 좋지 않았을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사실 고려가 건국할 때 오히려 무신들의 공이 컸습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신생국가 고려의 핵심적인 위치에 있던 것이 바로 무신이었으며 태조 왕건 이후의 혜종과 정종시기에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이를 제어하는 힘이 있는 법, 4대왕인 광종은 비대해진 이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 문신들을 대거 등용하였습니다. 과거제가 도입되고 이로써 고려도 문치주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무엇이든 균형이 맞아야 했지만 정치계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면 항상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문신들이 무신의 영역에 침범한 것으로 고려시대 군사와 관련된 병부의 고위직도 문신이 차지한 것입니다. 우리가 고려전기 외침을 막아내거나 정벌하는 데에 앞장섰던 서희, 강감찬, 윤관 등은 사실 모두 문신이었습니다. 이들 문신은 관직뿐만 아니라 부도 같이 축적했고 이 과정에서 불법적으로 백성의 것을 빼앗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당한 처우는 이후 계속되었고 의종 대에 이르러서도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는 본래 문학과 풍류를 좋아해서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놀러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의종의 신하들에 대한 차별입니다. 그가 잔치를 벌일 때면 잔치에 참여한 문신과는 달리 무신들은 호위를 호며 밤새 잔치가 진행되면 보초를 서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의종은 보현원이라는 곳에 신하들을 이끌고 행차하였는데 이미 이전에 정중부가 이의방과 이고를 불러 정변을 모의한 상태였습니다.
이 모의 역시 무신에 대한 차별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고려역사를 살펴보면 거란과의 일전이라든가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국방에 대한 중요성은 강조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정벌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그러면서 이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무력이 아닌 학문과 법에 따라 다스리자는 문치주의가 고려정치계에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처럼 군사력이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세력이 정치계에서 배제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 벼슬에 올라가는 데에도 문신과 무신 간에 차별이 있었습니다. 문신은 종1품인 최고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무신은 정3품까지 오르는데 그친 것입니다. 게다가 문신은 과거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했지만 무신은 자신이 갖고 있는 무예 능력으로 출세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신분이 낮은 사람 그 중에는 천민이 출세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신분을 중요시하던 당시 고려에서는 무신들을 하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변을 하기로 한 날에도 무신들은 의종이 문신들과 잔치를 즐길 때 호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의종이 무신들에게 씨름을 시켰습니다.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무신과 오병수박희를 겨루다가 힘에 부쳤는지 뒷걸음질쳤는데 이 때 젊은 문신 한뢰가 무례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씨름에서 진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며 모욕을 준 것입니다. 아무리 문신이라지만 정3품에 해당하는 고위급장군의 뺨을 때린 것은 무신들을 분노케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신들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이윽고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중략)...이에 승선 이세통, 내시 이당주, 어사 잡단 김기신, 사천감 김자기, 태사령 허자단 등 모든 호종(扈從)한 문관(文官) 및 대소신료(大小臣僚) 환시(宦寺)가 모두 해(害)를 만나매, 쌓인 시체가 산(山)과 같았다. 처음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오른 소매를 빼고 복두(頭)를 벗을 것이니 그렇지 않은 자는 다 죽여라라고 하였으므로 무인(武人)으로서 복두를 벗지 않은 자 또한 많이 피살(被殺)되었다.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뜻을 위로하고자 제장(諸將)에게 칼을 하사하니, 무신(武臣)들이 더욱 교만해져서 횡포하였다 " -고려사절요 中
보현원에 들어갔던 문신들이 물러나려고 할 때 그동안 쌓여왔던 무신들의 화가 폭발하면서 닥치는 대로 문신들이 살육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신들의 칼은 이곳에서만 춤을 추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칼날은 개경으로 향했고 문신을 찾아내어 보이는 대로 죽였고 정중부도 김돈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잡아 그를 죽이게 되는데 김돈중은 자신은 아무 죄도 없는데 죽게 되었다며 한탄하였다고 합니다. 정중부는 의종은 폐한 다음 유배를 보냈고 왕의 아우를 왕에 앉히니 그가 바로 명종입니다. 바야흐로 무인집권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한편 문신이라고 해서 모두가 무신들에게 살해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자량이라는 사람은 16세 때에 모임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 모임에는 문신자제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자량은 무신 두 사람을 넣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당시 모임의 일원들은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문무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며 끼워넣었습니다. 이 때 모임에 가담했던 무신들의 도움으로 인해 이 모임의 회원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러한 정변에 무신들도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담했느냐 안했느냐를 따진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거사를 일으킬 때 같은 편끼리는 머리에 쓴 모자를 벗고 오른쪽 어깨를 내어놓은 것으로 같은 편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를 몰랐던 무신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이후 100여년간 무인집권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시기 고려에는 왕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최고통치권자는 당대 최고의 무신에게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무인은 각자 자기만의 회의기구를 만들었는데 중방, 경대승이 설치한 도방, 최충헌이 설치한 교정도감, 그리고 최우가 만든 정방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무인들은 잡은 최고의 권력을 주체 못하고 남발하기 일쑤였고 그러면서 힘으로 다른 정치세력을 억누르기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이들 간에도 힘을 내세운 권력투쟁이 일어나 집권자 교체과정에서 피바람이 불었습니다. 무신집권기의 초반의 최고 권력자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명종에게 시집보내는 등 마음대로 권력을 누리다 정중부의 아들의 정균의 계략에 말려들어 피살되었고 다음에 정권을 잡은 정중부 역시 권력에 심취해 주체하지 못하다가 경대승에게 의해 제거되었습니다. 경대승은 왕권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고 경대승에 쫓기에 숨어 지낸 이의민이 권력을 잡았으나 전임 무인집권자처럼 함부로 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최충헌, 최충수 형제에게 제거당한 후 최충헌으로부터 시작한 최씨정권이 4대에 걸쳐 62년간 집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뒤를 이어 김준과 임연이 뒤를 이었고 임유무가 고려 왕 원종에게 제거당하고 나서야 1270년 다시 고려는 왕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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