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천도운동
2022. 8. 27. 20:2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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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이 몰락하였지만 그로 인해 추락한 왕권은 쉽사리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여진족은 이 기간에 고려로부터 동북 9성을 되돌려 받아 세력을 키워 금나라를 건국하여 북방의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고려에 사대를 요구하였습니다. 여진은 본래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겼는데 입장이 바뀌었고 고려왕실에서는 현실을 인정하여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대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때에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서경의 귀족세력이었습니다. 당시 금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불만이었고 이에 따라 고구려의 옛 도읍지이기도 했던 서경으로 기반으로 한 세력들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백수한과 정지상이 있었고 이들이 사람 한 명을 추천하니 그 자가 바로 묘청입니다. 그의 출생연대는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고 법명을 정심으로 개명한 사실만 알려졌습니다. 그는 승려이지만 도교에 심취했고 풍수지리와 도참에도 능한 사람으로 그는 서경으로 천도하자는 주장하였습니다. 묘청은 나라가 어지러운 이유에 대해 고려의 도읍지인 개경의 운이 다했다고 보고 고려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묘청은 궁궐을 서경으로 옮기면 금나라가 항복해 오고 사방의 26개의 나라가 모두 고려에 조공을 바친다고 하였습니다. 묘청의 이러한 주장은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것으로 특히 4대 임금 광종 이후에 개경의 귀족세력이 조정을 장악한 터라 인종 입장에서도 서경세력과 손을 잡기 위해 생각할 만한 주장이었으나 그렇다고 인종은 무턱대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인종은 묘청이 새 궁궐의 터라고 주장한 임원역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풍수지리설에 의거, 이 곳에 묘청의 말대로 새 궁궐을 지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곳에 인종이 행차하게 되었는데 묘청은 하늘에서 신선의 음악소리가 들린다고 했지만 믿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에 대해 인종을 포함한 여러 신하들이 내켜하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인물들 중에는 김부식이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김부식은 경주출신으로 개경에 기반을 둔 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도읍을 서경으로 옮길 경우 자신의 세력이 약해지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렇듯 개경파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음에도 이에 개의치 않고 묘청은 인종에게 칭제건원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묘청의 이러한 요구에 인종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묘청은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기 위해서 속임수를 썼습니다. 그는 서경이 신성한 땅임을 보여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왕이 대동강으로 행차했을 때에 오색으로 번진 모습을 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물속에 사는 신성한 용이 침을 토해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동강에 기름 바른 떡을 몰래 빠뜨려 그 기름이 떠올라 오색으로 번지는 모습으로 보이게 한 것으로 명백한 조작이었습니다. 게다가 서경에 새로 지은 궁궐에 벼락이 떨어져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홍수, 가뭄, 폭풍우 등 각종 자연재해가 일어났으니 『고려사』에서는 인종 재위 기간에 42차례의 자연재해를 기록하였습니다. 이에 인종은 더 이상 서경으로 행차하지 않게 되었고 서경천도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입지가 불안해진 묘청과 그의 세력들은 나라이름을 대위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부르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군대를 천견충의군라 부르는 대신 왕을 따로 내세우지 않았는데 여전히 고려 인종이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김부식은 개경에 남아 있던 서경파를 제거하고 서경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서경을 둘러싸자 불안해진 반란군 중 조광은 묘청의 머리를 베어 바치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정부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년이 넘는 싸움 끝에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습니다.
이러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에 강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바로 일제강점기 시기의 사학자 단재 신채호선생의 언급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보고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싸움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불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라고 평한 것입니다. 다만, 신채호 선생은 묘청이 광망(狂妄)하여 준비가 너무 안 된 상태로 성급하게 난을 일으켜 주변 사람들을 사지에 빠뜨리고 대의를 그르쳤다고 평가하였으며 이 난의 실패로 인해 우리나라의 역사는 보수사대주의로 고착화되는 계기가 되고 따라서 조선사 1천 년 이래 제 1대 사건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사실 이 사건 이후로 서경 출신은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습니다. 반대로 개경의 문신 귀족들은 기득권을 더욱 확실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문신들이 조정의 요직과 경제력을 독점하는 것으로 전개되었고 무신들에 대한 홀대로 이어졌으니 이건 추후의 무신정변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묘청의 난이 일어난 데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훈요 10조에서 왕건이 강조한 서경을 중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건은 후대 임금들에게 1년 중 100일 이상 서경에 체류할 것을 권했습니다. 묘청은 이 의견을 존중하자는 쪽이었고 김부식은 이에 반대하는 쪽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쪽도 다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입장에서는 서경을 중시하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1년 중 100일 이상을 서경에 머무르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닙니다. 이에 더해 인종은 이전에 이자겸의 난을 겪었습니다. 그러한 사건을 겪은 개경에 대해 환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자겸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한 사건을 생각하면 묘청의 서경천도계획은 인종의 마음을 상당히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거기에 확실하게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금나라의 성장입니다. 하지만 금나라의 패권을 인정하자는 현실론자 유교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당연히 반대하였는데 그럼에도 인종은 묘청의 말에 더욱 현혹되었습니다. 그리고 서경에 지어지는 궁궐에 팔성당을 지었는데요. 이것은 바로 신선교에 해당하는 건물로 이 신선교라는 것은 선녀나 신선이 되는 수행을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는 신라의 화랑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신채호가 화랑, 불교 대 유교의 싸움이라 하면서 화랑이라는 단어를 넣은 것은 당시 묘청이 신선교에 심취한 승려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로이 짓는 건물에 신선교 건물에 해당하는 팔성당을 짓는 것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는 개경파 세력에게 더욱 심기를 자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 묘청의 난은 과연 적절한 표현일까. 고려 입장에서는 반란이 맞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나라이름을 정하고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 세력 중 그 어떤 누구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종에게 대위국의 황제에 오르라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말이 좋아 상소문이지 강제성을 띤 협박문이었고 이는 김부식과 묘청 사이에서 마음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인종의 마음을 김부식 쪽으로 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당시 서경에 궁궐을 짓고 많은 조정의 대신들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을 지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벌귀족들의 폐쇄성에 반기를 든 이 움직임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진행했다면 성공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도 이해되지 않은 현상으로 왕에게 천도를 재촉하고 게다가 이러한 것이 풍수지리설이라든가 토속신앙에 근거한 것이어서 인종의 마음을 서경 쪽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인종이 서경으로 천도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겠으나 우리 역사에 있어 그런 역사적 판단은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한 상황에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옳은 것이다 그른 것이다하는 것은 개인에게 맡겨질 문제입니다. 다만 이후의 고려의 정치권력은 고인 물이 되어 고려가 이후 점차 하락세를 탄 것은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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