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의 여진 정벌과 동북9성

2022. 8. 25. 20:3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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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

고구려나 발해가 차지한 북방 영토에 여진이 살고 있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말갈 혹은 숙신, 읍루라고 불린 여진은 중국과 핏줄과 말이 달랐고 더러는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이들은 말을 잘 타고 용맹했습니다. 따라서 태조 왕건이 후삼국통일전쟁을 치를 때에는 이들을 이용하였으으니 우리 역사에서도 일찍부터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러한 여진부족 중 요나라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을 숙여진, 그렇지 않은 여진은 생여진이라 불렀습니다. 한편 고려에서는 함경도 일대에 거주하는 여진족을 동여진, 평안도 일대에 사는 여진족을 서여진이라 불렀고 이러한 여진족은 고려에 공물을 바치고 식량이나 옷감, 농기구, 무기 등을 가져갔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여진족을 편안히 바라보고만 있던 것은 아니어서 1044년 정종 때에는 천리장성을 쌓기도 했습니다. 여진족들 중에는 고려 출신으로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려인 김준 혹은 김극수의 후예로 불리는 이들도 있어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평화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려가 북진정책을 시도하면서 여진과 부딪히게 되었고 고려의 힘이 북방으로 뻗치면 그에 따라 여진은 고려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지배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진은 이러한 고려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힘이 커지면 고려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완안부 부족이 고려로 침범하여 큰 근심거리였는데 이들은 고려와 친했던 여진부족을 자기네 편으로 만들고는 고려에 대한 침범을 준비합니다. 이 정보는 고려에도 전해졌는데요.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고려가 선제공격을 하였으나 깊숙이 들어갔다가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패배는 여진족의 역공으로 이어졌고 고려의 정주지역까지 들어와 약탈과 범죄가 자행되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그나마 두각을 보인 이는 척준경이었습니다. 그는 하급관리자격으로 참가한 군인이었는데 임간에게 무기와 갑옷 입힌 말 1필을 요구한 뒤, 이를 착용하고 나아가 장수 1명을 베고 포로로 잡힌 2명의 고려군을 구출합니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윤관을 통하여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윤관은 패전하였고 이에 윤관은 적의 군대는 기병인데 반해 고려의 군대는 보병이므로 여진족에게 패배하였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리하여 기병을 보강하면서 만든 부대가 바로 별무반이었습니다. 사실 이 부대는 여진족을 토벌하기 위한 특수부대라기보다는 여진족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개편한 군대조직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말이 필요하여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모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신기군에 편성했고 말이 없는 자들을 보아 보병군대인 신보군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승려들로 구성된 항마군도 만들었으니 이 병력은 요나라의 일전 때는 볼 수 없었던 국가적인 전쟁준비였고 그만큼 고려입장에서는 여진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동북9성

1107년 예종 2년에 여진족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전에 계략을 써서 고려는 여진에 사람을 보내 억류했던 여진족 풀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석방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여진족 400여 명을 초대했는데 이들은 그 자리에서 고려군에게 학살당했습니다. 이를 눈치챈 40~50 여명의 여진족이 달아나려 했으나 병마판관 김부필과 척준경에 의해 사로잡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윤관은 2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오니 여진족 입장에서는 당황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척준경이 앞장서서 여진족을 무찔렀고 이에 기세를 얻은 고려군이 여진족을 몰아붙였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전투에서도 고려군은 여진족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를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전열을 가다듬은 여진족의 반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여진입장에서는 고려와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한편 고려군은 북진하다가 여진족의 매복함정에 걸려들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에 지휘관인 윤관과 오연총이 생포 혹은 죽을 위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 척준경이 1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게 윤관일행을 맞이하며 이를 보호하기 시작합니다. 여진족들이 이들을 포위할 때즈음 병마판관 최홍정과 장군 이관진이 이끄는 고려군이 등장하며 이 위기를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주성을 돌아왔지만 이후 이 성을 여진족들이 둘러쌌습니다. 윤관은 성안에서 수비할 것을 지시했으나 척준경은 이를 반대하고 자신이 결사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향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결사를 이끌고 출정한 척준경은 여진족 진영으로 뛰어들었고 여진족을 참살하는 척준경을 보자 이에 겁을 먹은 여진족은 영주성에 대한 포위망을 느슨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공성전과 전투가 이어졌으며 끝내 예종에게 승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기존의 영주와 복주, 옹주, 길주 외에도 공험진과 함주에 추가로 성을 건설하고 통태진과 평융진에도 성을 건설하며 이 곳에 남쪽의 백성들을 이 곳으로 이주시킵니다. 


이른바 동북9성, 하지만 이후가 문제였습니다. 윤관의 여진정벌로 그들의 침략활동을 멈추었다면 동북9성은 실효성 있는 계획이었지만 문제는 그들이 고려가 성을 쌓고 있는 와중에도 공격을 해온 것입니다. 1108년, 윤관과 오연총이 개선장군이 되어 개경으로 돌아왔지만 웅주성이 여진족에게 포위되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오연총은 다시 임금의 명을 받고 다시 웅주성으로 가서 여진족의 포위망을 해체시킵니다. 하지만 여진족의 공세는 계속 이어졌고 고려군과 여진족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 그와 별개로 개경의 고려왕실에서는 술판을 벌였고 조정에서는 동북9성을 되돌려주자는 상소가 올라왔습니다. 
당시 고려에서는 전쟁이 3년째 접어들면서 회의론이 고개를 들던 시점이었습니다. 당시 여진은 사람을 보내 동북9성을 되돌려받는 조건으로 화친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여진족은 길주성이란 곳을 공략하였습니다. 고려는 이 싸움에 지쳐갔고 설상가상 이들을 구원하러 가던 오연총 장군의 구원부대가 기습을 당해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여진족이 기주성을 둘러싼 것인 3달이 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윤관이 이끄는 부대가 다시 길주성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져서였을까. 여진족은 길주성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고 성안으로 들어가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문짝과 수레등을 바리케이트를 만든 고려군이 다시 공격에 임하자 성안까지 들어왔던 여진군대는 성 밖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구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여진족은 고려에 강화요청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를 통해 여진에서 보낸 사절단이 고려의 개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동북9성의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리하여 동북9성을 돌려주기로 한 것인데 당시 사절로 왔던 여진사람도 감격하여 울면서 절을 했다고 하니 여진족 입장에서도 힘든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여진족은 함주성 밖에 제단을 쌓고 다시는 고려를 공격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기로 맹세합니다. 
모양새는 그렇지만 사실상 여진족이 자신의 터전을 지킨 전쟁이었습니다. 1113년 여진은 아골타라는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1114년에는 요나라를 공격하고 이후 이들의 세력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리고 금나라를 세우고 1115년에는 스스로를 황제라 할만큼 세력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송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상경을 함락하였고 송나라와 영토분쟁을 겪게 되자 이에 다시 송나라를 침공하여 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을 사로잡았습니다. 동북9성을 되돌려 받은 것이 1109년이 일이었고 1126년에 정강의 변이 일어났으니 불과 20년도 안되어 벌어진 일입니다. 
 그럼 동북9성은 어디일까요. 일본학자들은 이 곳은 함흥평야 일대로 한정시켰고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길주를 비롯한 두만강 남쪽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두만강 북쪽으로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윤관은 이들 지역 중 가장 북쪽에 공험진이라는 지역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700리 떨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윤관은 만주지역까지 정벌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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