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무역항 벽란도
2022. 8. 23. 20:2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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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대외교류가 활발한 나라였으며 당시의 주변국들 송, 여진, 일본, 거란을 비롯하여 토번과 섬라곡국(타이), 대식국상인들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몰려온 곳은 바로 벽란도라고 하는 개경의 입항이었습니다. 벽란도라고 하면 ‘도’라는 글자가 붙기 때문에 섬이란 생각을 하기 쉽지만 사실 이 때의 도는 섬 도가 아닌 건널 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에 드나들었던 여러 나라중에 가장 교역이 잦았던 국가는 송나라였습니다. 송나라배가 고려의 영역 내인 흑산열도에 오게 되면 이들을 영접하기 위한 관리들이 나가서 상황을 보았으며 밤에도 송나라 상선이 통과할 수 있도록 지역에 봉화를 올려 예성강 하구로 인도하였습니다. 송나라사신들이 머물 수 있는 순천관을 포함하여 여러 욍국인숙소도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에 알려진 중국의 문장가로 소동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송팔대가로 불린 이 사람에 대한 고려인들의 사랑은 유별났습니다. 과거시험에 매달리느라 정신없었던 사람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나서야 소동파의 시를 애독했으니 과거급제자가 나오면 올해의 소동파가 00명이 나왔다고 이야기했으며 김근이란 사람은 소식, 소철 형제를 사모하여 그의 넷째 아들과 다섯째 아들의 이름을 김부식과 김부철로 개명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의 김부식이 바로 『삼국사기』의 저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려인들의 소동파의 사랑은 짝사랑에 불과했습니다. 정작 소동파는 고려를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송의 연호를 쓰지 않고 송과 거란을 사이에 두고 등거리외교를 펴는 고려를 유달리 싫어했습니다. 그 정도가 어땠냐면 7차례에 걸려 상주문을 올리면서 고려와 멀리할 것을 이야기했고 그에 따라 가지 5가지 해악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로는 고려의 조공품은 노리개와 같은 무용한 물건이지만 송의 답례는 국고에 나온 현찰로 백성의 피이며 둘째 고려사신을 묵는 영빈관수리에 지나치게 경비가 많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고려에게 내린 하사품이 거란에게 흘러들어갈 여지가 있고 이는 곧 적에게 양식을 주는 모양이고 넷째, 고려가 중국을 흠모하며 중국의 산천을 그려가지만 이것은 중국의 허실을 보아 거란에게 제공할 것이고 다섯째는 송과 거란이 잠시 맹약을 맺은 상태인데 송과 고려가 교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거란에서는 이를 구실삼아 약속을 깰 수 있으므로 송나라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소동파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당시 고려와 송 사이의 교역이 상당했음을 이야기해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동파의 주장에도 고려와 송나라사이에서 교역을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송나라입장에서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적인 목적에 있었고 고려는 송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역시 외교적으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쌍방향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러한 활발한 교역과 국제항구로서 벽란도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작자미상의 고려가요 ‘예성강곡’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곳에 찾아온 송나라의 상인 하두강은 주막집 여인을 보고 반해 그 주인에게 내기바둑을 청했습니다. 본래 고수였던 하두강은 일부러 져주면서 그 때마다 비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줄 게 배밖에 없다면서 주인의 부인을 두고 바둑내기를 하자고 합니다. 이를 승낙한 주막집주인은 내기바둑에 지고 말았습니다. 주막집주인은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때는 늦었고 하두강은 그 주막집부인을 데리고 송나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배는 쉽사리 앞을 가지 못했는데요. 점쟁이는 배가 멈추고 빙빙 도는 이유는 배에 억울한 사람이 있어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하두강은 배를 다시 예성강으로 돌려 벽란도로 향했으며 그제서야 움직인 배로 인해 주막집부인은 주막집주인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때의 기쁜 마음으로 지은 노래가 바로 ‘예성강곡’입니다.
이러한 재밌는 이야기가 탄생한 무역항 벽란도에서는 어떠한 물건들이 오고 갔을까요. 송나라 장사꾼들은 자기 나라의 특산물인 비단, 자기, 서적, 악기, 문구류 등을 가져와 팔았고 고려의 특산물인 인삼, 모시, 금, 은, 나전칠기(螺鈿漆器)9), 갓, 화문석 등을 주로 사갔습니다. 1228년 남송의 저장성 경원에서 편찬한 지방지 『보경사명지』에는 고려가 중국에 판매한 상품들에 대해 자세히 써놓았습니다. 값비싼 품목은 ‘세색’이라 하였고 비교적 저렴한 품목은 ‘추색’이라 하였습니다. 인삼, 사향, 밀랍은 세색이었고 명주, 밤, 대추, 강황, 호피, 구리그룻, 돗자리, 청자가 추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13세기에 생산되었을 상감청자가 우리 입장에서는 고급적인 이미지이지만 당시 교역에서는 값싼 품목으로 올렸다는 점입니다. 아마 고려에서 송나라에 값싼 자기를 수출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송나라의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태학에서는 식사할 때 질그릇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값싼 자기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므로 고려의 자기 역시 그리 분류되었을 것입니다.
1983년에는 전남 왕도군 약산면 어두지섬에서 불과 72m 떨어진 바다에서 청자 4점이 어부의 그물에 걸려올라왔고 그에 따라 인양작업을 토하여 청자를 올리게 되니 무려 3만 점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양된 청자의 대부분은 사발처럼 입이 벌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12세기 전반 고려 중엽의 고려자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상당한 고급진 모습의 고려청자가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배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질이 낮은 그릇들이었고 그릇바닥에 하얀 점토같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대량생산의 흔적입니다. 그릇들을 포개 구울 적에 서로 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열에 강한 내화토를 바닥에 발라두는데 이것이 하얗게 남은 자국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비색청자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색청자는 고급품이고 이 때 인양된 것은 중저가에 해당하는 녹청자로 대중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그에 맞는 제품들이 생산된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이유에서 당시 고려청자를 수입하는 송나라입장에서는 추색으로 분류되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대식국이란 불린 아라비아 상인들은 벽란도에 와 수은, 향료, 산호등을 팔았으며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해 고려란 이름이 ‘코리아’란 이름으로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이들이 방문한 것은 1024년과 그 다음해 그리고 1040년, 이렇게 세 차례입니다. 생각보다 아라비아상인들의 왕래는 빈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항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는데 배는 오로지 노와 돛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위는 평평하고 아래는 V자형인 배를 건조해 항해했는데 이러한 배는 심하게 흔들리더라도 전복될 위험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뒤로 큰 돛과 작은 돛을 달았으며 당시 항해부속장치라고 할 수 있는 뜸과 키를 이용하여 바람이 옆에서 불더라도 갈지자로 이동하며 나아갔습니다. 이렇게 송나라 명주에서 출발한 배는 10일에서 20일이면 고려에 도착했으나 어찌되었든 이러한 길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본래는 덩저우에서 출발하는 북로가 보다 더 짧고 안전했는데 이러한 길은 북방민족에게 들킬 염려가 있었으므로 기간이 길더라도 명주에서 출발하는 남로길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무역의 길은 송나라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남북국시대의 장보고처럼 고려인들이 당시 무역에서 활약이 두드러지지 못했던 것은 고려에서 소비되는 해외물품들이 대부분 지배층에서 소비되었고 대외무역을 장려하며 상업자본을 축적한 송나라와는 달리 고려는 그에 준하는 상업자본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벽란도를 포함한 여러 무역 중심지에서의 고려의 무역수지는 적자를 기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에서는 선진문물과 값비싼 물건을 수입하는 한편 고려입장에서는 인삼을 제외하고는 고가품이라고 할만한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러한 적자분은 어디서 메웠을까요. 아마도 백성들에게 금을 거두어 메꾸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벽란도는 고려의 국제무역항이지만 이곳을 통해 고려지배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역할을 했고 그리고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이 공물을 바쳐야 했으니 벽란도의 화려한 거래 뒤에는 고려백성들의 한숨이 묻어 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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