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2차 침입과 귀주대첩
2022. 8. 21. 20:2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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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고려에 대한 1차, 2차 원정을 단행하였으나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어내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2차 공격은 고려의 황제를 생포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된 항복은 받아내지도 못했으며 퇴각하면서 공격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만약 확실한 승리를 하고 퇴각하는 군대였다면 이처럼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상 실패였던 셈입니다. 1018년 10월에 3차 원정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2차와 3차 원정 사이에 요나라의 침입은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1013년에 여진족과 거란의 연합군대가 압록강을 건너려다가 대장군 김승위가 이끄는 고려군의 반격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1014년 10월에는 요나라 장수 소적열이 통주와 흥화진으로 침입하였으나 패배하였고 다음 해에는 요나라가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를 보호하기 위한 성을 쌓자 이를 본 고려군이 공격합니다. 하지만 성과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거란은 다시 침략하여 흥화진을 쳤으나 함락에 실패했으며 이와 동시에 거란은 고려에 강동 6주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신을 억류해버리니 고려의 입장에서는 거란과 일전을 다짐한 것이었습니다. 1015년에는 요나라군대가 흥화진과 통주로 침입하였으나 정신용의 고려군대가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기세를 이어 고려군이 이를 쫓았으나 거란의 유인책에 걸려 고려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거란은 이 기세를 몰아 안북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이를 다시 공격한 고려군은 다시 유인책에 말려들어 고적여와 장군 소충현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합니다. 1016년에는 야율세량과 소굴렬이 이끄는 요나라군이 곽주성을 함락합니다. 하지만 곽주성을 점령한 요나라군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요나라 측의 기록에 따르면 야율세량이 갑자기 병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즈음에 요나라는 사신을 보냈지만 이들은 들어오지도 못했고 고려는 요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전사한 장군과 병사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 자식들에게 관리직을 내려 사실상 전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집니다. 1017년에는 요나라군이 다시 흥화진을 포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도리어 성문을 열고 뛰쳐나온 고려군에게 크게 당하고 맙니다. 요나라의 끊임없는 강동6주에 대한 공격은 사실상 성과도 없이 실패로 끝난 셈입니다. 어려 차례 고려의 성을 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보급문제는 요나라 군사에게 큰 문제였고 기병으로 구성된 그들의 군대로 성을 함락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고려의 험준한 산악지형은 그들을 난감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조건 속에서 고려와의 일전은 한 두 번의 승리를 챙길 수는 있겠지만 고려 자체를 굴복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거란은 도통에 소손녕의 형인 소배압을 임명하고 1018년 10월 전쟁을 끝내기 위한 군대를 편성합니다. 들판에서의 싸움은 요나라에게 유리했으나 고려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험준한 산을 끼고 싸워야 했고 그리고 각각의 성들을 함락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성을 공격하려면 운제와 포차 같은 시설이 필요했고 성을 상대하다보면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고려의 왕을 사로잡는 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몇 년 동안 강동 6주를 공격하는 동안 성과가 없었으므로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 고려의 왕을 사로잡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고려에도 포착되어 고려도 대대적으로 전쟁준비에 들어갑니다.
1018년 12월 10일 도통 소배압이 이끄는 요나라 군대가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2차침입 때에서 본 것처럼 거란은 흥화진을 거쳐 두 갈래 길로 남진해야 합니다. 그런데 흥화진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남하하였습니다. 흥화진은 한 번도 함락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전략을 썼던 것 같습니다. 요나라 군대는 흥화진을 감아서 도는 삼교천을 건너게 되었는데 12월임에도불구하고 물이 얼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려사』에서는 강감찬 장군이 미리 강의 상류에 소가죽으로 둑을 만들어 요나라 군대가 건널 때에 터뜨려 요나라군대를 곤경에 빠뜨린 다음 공격했다고 하는데 아마 물이 얼면 쉽사리 건널 수 있으므로 물이 얼지 않도록 상류에서 계속 물을 흘려보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요나라 군대는 한 겨울에 물을 건너야 하는 상황에 고려군의 공격에 피해를 입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나라의 군대는 남쪽으로 향합니다. 아마 이전에 삼교천을 건너다가 타격을 입은 요나라군대는 주력부대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청천강을 건넌 요나라의 군대는 계속 남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려입장에서는 이 움직임을 파악하였지만 워낙 대군이고 행군 속도가 빨라 쉽사리 공격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남진하는 요나라군을 고려군이 뒤쫓았습니다. 그리고 자주의 내구산 근처에서 강민첨의 부대가 요나라의 후미를 덮치면서 전투가 벌어졌고 요나라군대는 큰 타격을 받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진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나라부대는 서경을 우회하여 마탄이라는 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 곳에서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공격을 받습니다. 여기서 요나라는 1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패배하였습니다. 하지만 패배에도 요나라부대는 다시 남진하여 개경으로 향합니다. 이 즈음 개경의 현종은 사면령을 내리고 개경 주변의 백성을 궁 안으로 피신시킵니다. 전쟁을 다짐한 것인입니다. 또한 근처의 집을 부수고 식량들도 모조리 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라 부대는 개경과 불과 4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도착합니다. 그러더니 소배압은 부하인 야율호덕을 개경으로 보내 철군하겠다고 합니다. 그래놓고 요나라부대는 기병을 몰래 빼내 치기로 합니다. 그러나 금교역에서 고려군과 마주치게 되고 오히려 요나라군이 패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요나라 군대는 물러나야 했습니다. 서경을 지나면서 강감찬의 고려군과 맞닥뜨려야 했고 산발적인 교전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북진하다가 귀주라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요나라 입장에서는 퇴각하기 위해서 고려군과 일전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고려군에 맞서 이들은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배수진을 쳤습니다. 사실상 요나라군대는 전의를 상실했고 그나마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필사적으로 이를 싸우지 않겠느냐는 야율팔가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라부대와 고려군이 맞붙었습니다. 치열한 싸움 속에서 병마판관 김종현의 부대가 합류합니다. 그리고 요나라의 부대 쪽으로 비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팽팽하던 싸움의 추는 고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요나라의 진영은 무너졌고 고려군이 이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여 타격을 주기 시작합니다. 사실상 일방적인 고려군의 공격이었습니다. 요나라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정면전에서 고려군을 상대로 엄청난 첫 패배를 당한 것입니다. 이렇게 3차 침입은 마무리됩니다. 이 3차 침입은 요나라 입장에서는 이전에 없었던 대패였으며 이에 거란의 성종은 분노하여 소배아의 얼굴 가죽을 벗겨버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요나라의 고려에 대한 침략 야욕이 꺾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나라의 역사기록서 『요서』에는 1019년에도 고려에 대한 출병 명령을 내린 적이 있으며 1023년에도 고려를 침략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4차 침입에서도 뚜렷한 성과는 얻지 못했ㅅ브니다. 하지만 고려의 기록에서는 이 전투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전에 있었던 전투과정이나 결과로 볼 때 별의미없는 전투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후 요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으며 고려도 억류한 사신을 돌려보내며 두 국가 간에는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가 요나라의 연호를 쓰면서 더 이상 둘 사이 간에 전쟁은 없게 되었습니다.
3차 거란과의 일전에서 큰 승리를 이끈 고려군의 총사령관 강감찬은 3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양주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삼각산의 늙은 중을 잡아 야단치고는 내쫓으니 두 번 다시는 양주의 골칫거리인 범들이 함부로 사람들을 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감찬은 나무를 베어 호랑이가 살 터전을 없애 범을 몰아냈는데 이후의 귀주대첩의 승리와 맞물리며 강감찬은 후대인들의 기록서에도 신화적인 인물로 재탄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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