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로의 시무 28조
2022. 8. 19. 08:0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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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 초기의 불안함 속에서 왕권 강화라는 목적을 두고 행했던 광종의 정책들은 엄청난 희생을 몰고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에서는 그의 공포에 가까운 정치보다 그가 행한 과거제와 노비안검법같은 정책들이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광종이 행한 숙청의 표적이 결국 농민이나 일반 백성이 아닌 당시의 지배층을 향하고 있었고 호족 일변도의 관직등용이 아닌 과거제를 통해 인재등용의 폭을 넓히고 노비안검법을 통해 호족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억울한 노비를 풀어 양인을 만든 것은 표면적으로는 백성들에게 환영받을 만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덕’, ‘준풍’과 같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광종에 이은 경종 시기에는 광종에 반대하는 분위기에 휩쓸려야 했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광종이 강화한 왕권을 그대로 후대에게 물려주지 못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의 업적은 고려라는 나라가 유지되는 대에 있어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은 지배층에 의해 기록되기 마련입니다. 광종의 평가도 그런 점에서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주변숙청작업의 당사자가 당시의 역사를 기록하는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려 전기에 최승로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는 경주출신의 유학자로 그의 부친 최은함은 신라에서 벼슬을 하였습니다. 그는 오래도록 아들이 없었는데 기도를 드리고 최승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최승로를 나은 3달 뒤, 후백제의 견훤이 경주를 습격하여 절에 가서 아이를 보호해달라며 관음보살 아래에 감추어두고 피난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반 달이 지나서 찾아와 보니 아이는 목욕한 것처럼 살결이 고왔고 젖냄새까지 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비를 넘긴 최승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서 12살 때 태조 왕건 앞에서 『논어』를 읽어 상을 받았습니다. 최승로는 고려의 6대 임금 성종을 섬겼는데 당시 성종은 5품 이상의 관리에게 왕만이 볼 수 있게끔 밀봉하여 상소문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시무책을 올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올려진 것 중에 최승로의 것도 있었으니 고려를 다스린 다섯 왕에 대한 비평과 함께 시무책 28조목을 함께 적은 것, 이른바 시무28조입니다.
여기서 최승로가 가장 비판한 왕은 바로 광종이었습니다. 광종에게 과거제를 건의한 쌍기가 중국인이었는데 광종은 쌍기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을 받아들였고 이들을 대우해주기 위해 국가재정을 악화시켜 대신들의 불만을 샀단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시행을 포함한 광종의 여러 정책들에 대해 최승로는 사실상 ‘개혁실패’라는 평가를 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종에게 개혁안으로 시무28조를 올린 것입니다.
시무 28조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국경을 정하고 그 지역 출신들에게 경비를 맡겨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만큼 당시 국방상황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성종에게 국경을 정하여 토착민들 중에 말달리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을 골라 경비에 종사하게 하여 군사를 교대경비하는 불편을 없애고 그에 따라 보급품과 군량이 운반하는 줄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궁중 숙위 군인 수를 줄일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을 관리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너무 번잡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수를 줄여 경비도 줄이고 원망하는 사람들의 수도 줄여야 한다고 간언한 것입니다.
최승로가 유학자였던 만큼 불교가 가지는 폐단에 대해서도 지적했습니다. 그는 불교행사가 국고의 낭비와 체력적으로도 소모를 가져온다고 보았습니다. 불교행사의 개최는 백성의 피와 땀을 짜내는 것이라 안타까워했으므로 이를 줄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교관련폐단으로 지적한 것이 바로 사찰의 고리대로, 이를 금지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한 백성들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승려에게 복을 구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종은 굴산의 승려 여철을 대궐로 불렀는데 그를 영접하면서 큰 돈을 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승려가 사는 땅이 고려 국왕이 것인데 따라서 그가 먹는 것도 고려왕이 주는 은혜와 같으므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광종 때의 어떤 승려는 요역을 기피하기 위해 산에 살았는데 광종이 그를 경의를 표하고 예의를 다한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길거리에 죽은 것을 보니 평범한 승려도 자신들의 화를 막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준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승려들은 군과 현을 왕래하면서 횡포를 부린 것으로 보이는 바 이들의 객관, 역사 숙박을 금지하자고 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불경을 필사하고 불상을 만드는 것은 사치라며 이를 금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는 잦은 사신왕래를 경계하였는데 이를 통해 중국이 우리를 얕잡아볼 수 있다고 하였으며 중국의 제도는 따르되, 풍속까지 따를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용들에는 백성들을 살피는 내용들이 주로 이루고 있습니다. 지방관을 파견하여 백성을 살피도록 조언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생계가 곤란한 섬의 주민들에게까지 공역을 할 때에는 공평히 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고려에서는 봄에 연등회를 개최하고 겨울에는 팔관회를 개최했는데 이것을 줄이거나 금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사를 치르기 위해 사람들을 징발하고 부역에 종사하게 했으며 행사에 쓴 여러 물건들은 단 1회만 사용되니 여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연등회와 팔관회는 「훈요 10조」에서도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됩니다.
최승로는 유학자이므로 유교적인 질서를 시무 28조를 통해 강조하였습니다.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충성으로 임금을 섬겨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불교는 종교 이념으로 몸을 닦는 근본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은 유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최승로도 고려의 종교가 불교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내세운 것은 불교와 유교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이며 수양은 불교식, 정치는 유교식으로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유교적 질서를 일반 백성들에게 적용하기를 원했으니 노비와 주인을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유교적 질서를 내세우며 먼저 있었던 광종의 노비안검법을 비판한 것입니다. 노비안검법을 통해 노예들이 귀한 사람들을 능욕하고 그에 따라 공신들은 이를 원망하였으나 간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함께 이야기한 것이 바로 공신자손을 등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승로는 공신의 자손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천인들과 섞여 살고 신진세력이 그들을 업신여겨 불평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를 받아들인 성종의 고려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불교행사를 크게 축소하고 대신 유교 의례를 도입하여 태묘, 사직단, 문묘를 설치하고 하늘에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고려임금의 명령을 황제의 명령을 뜻하는 ‘조서’로 표현했으나 성종은 유교질서에 따라 왕의 명령이라는 의미를 가진 교서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유교정치의 도입은 고려가 스스로 위신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교질서를 통해 노비제도와 신분제도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종이 힘으로써 반대 세력을 없애는데 개혁을 단행하며 기존의 세력을 자신의 세력을 키워 이를 견제하려 했다면 성종은 대신들과의 합의를 통해 제도를 개혁하고 안정된 고려를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성종에 의해 수용된 시무 28조로 인해 고려는 이전보다 한층 성숙된 국가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고 이후 고려의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최승로는 성종왕권의 브레인이자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며 훗날 조선의 정도전이 꿈꾼 국가운영의 롤모델이 이미 몇 백년 전에 고려왕조에서 행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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