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치판의 여걸 천추태후

2022. 8. 18. 20:2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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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는 왕건의 사후 혼란했었던 고려의 초기 964년 왕건의 손녀이자 대종의 딸로 태어납니다. 천추태후는 어렸을 적 할머니에 맡겨져 자랐습니다. 왕건이 혼인정책으로 여러 호족들과 관계를 맺었던 만큼 천추태후의 할머니도 유력 호족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호족에 대한 엄청난 숙청 작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천추태후의 부모도 이 때 제거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그의 할머니는 천추태후를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황보라는 성을 사용하게 합니다. 
이후 천추태후는 18살에 고려의 왕인 경종에게 시집을 가게 됩니다. 천추태후 뿐만 아니라 그의 동생도 경종에게 시집가니 자매가 같은 남자를 남편으로 둔 셈입니다. 당시 경종에게는 이미 두 명의 왕비가 있었다고 하는데 경종에게 두 손녀를 시집보낸 것을 보면 천추태후의 집안은 꽤나 권력을 자랑하던 집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천추태후가 경종과 관계를 맺어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왕송입니다. 아무래도 이 때부터 천추태후는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된다면이라는 상상을 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이자 고려국왕인 경종이 아들 왕송이 돌이 겨우 지나자마자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2살도 안된 아이가 왕위를 이어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6대 왕으로 성종이 즉위했으니 그는 천추태후보다 4살많은 친오빠였습니다. 
왕이 아무리 자신의 오빠라지만 자신은 선대 왕의 후궁이었으므로 더 이상 궁궐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천추태후는 김치양이라는 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를 알아챈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냅니다. 이에 대해 천추태후는 섭섭한 마음을 정하며 따졌습니다. 사실 고려의 사회모습은 조선과 달랐습니다. 성리학질서가 깊게 박혔던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남녀가 시내에서 같이 목욕할 정도로 개방적이었으며 고려왕은 과부를 왕비로 맞이하거나 한 번 결혼했던 여자와 재혼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선대왕의 후궁을 다시 후궁으로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고려는 조선처럼 여성의 정절을 강요하던 시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종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구실삼아 김치양을 귀양보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이면에는 다른 목적도 있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또한 천추태후의 동생이자 경종의 부인이었던 헌정왕후도 애인을 두고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인 왕욱이었습니다. 이에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펴던 성종은 두 여동생의 사랑에 불편함을 느꼈는지 그마저 유배보내게 되었는데 헌정왕후는 이후 아들을 낳다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교를 통치이념을 삼으면서 두 여동생의 애인을 유배 보낸 성종은 마흔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뜨게 되었고 천추태후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해 그가 왕위에 올라 목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종의 뒤에서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천추태후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천추는 왕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행사하며 머물렀던 천추궁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고려는 황제국을 지향하는 나라였기에 왕의 어머니란 의미로 헌애왕태후 황보씨에서 천추태후라 불린 것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천추태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유배간 김치양을 되돌리는 일이었습니다. 유배 가있었지만 상당한 정치적 파워를 자랑하던 김치양이었기에 김치양의 존재는 천추태후에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습니다. 천추태후는 황주출신, 김치양은 동주출신이었는데 이 둘은 같은 황해도 지역으로 당시에는 패서지역으로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아마 이 지역출신의 인재를 등용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추태후는 성종이 펼치던 유교중심의 정치, 중국화정책, 신라계승 정책에 불만을 느꼈고 불교를 적극 지지하며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습니다. 그리고 서경을 중시하며 전통문화를 되살리고자 하였는데 그렇다고 유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천추태후는 섭정을 하면서 실리적인 외교를 하였습니다. 당시 중국대륙에서는 거란과 송나라가 대치하고 있었는데 송나라는 고려와의 외교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란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려에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종의 유교정치에 의하면 거란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 송나라와 외교관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천추태후는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계를 지속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적 외교가 빛을 발했는지 천추태후 12년의 섭정기간 동안 외침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목종에게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착한 아들이었지만 즉위 후 6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으니 그 이유는 그가 남색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자한테 감정을 느끼지 못했고 남자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특히 발해출신의 문신인 유충정을 아꼈다습니다. 아마 천추태후의 계획은 목종을 통해 손자를 낳아 왕위를 잇는 것이지만 계획이 틀어져 그는 또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김치양과 관계를 맺어 42세에 아들을 낳습니다. 천추태후는 자신이 낳은 또다른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두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획대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동생 헌정왕후가 낳은 아들이 12살이 소년이 되니 그가 대량원군이었습니다. 이에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출가시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량원군을 맡은 절에 궁궐에서 산해진미를 보내옵니다. 그 때 절을 지키던 진관이라는 스님이 대량원군을 숨기고 음식에 손도 못대게 하였습니다. 이후 궁궐 사람들이 물러가자 음식을 마당에 버렸습니다. 이에 동물들이 몰려와 음식을 먹었는데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후 자객들을 보내 대량원군의 목숨을 노렸지만 진관스님의 도움으로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1009년에 연등행사를 열었는데 이 때 천추전에 큰 불이 났습니다. 이에 목종은 큰 충격을 받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혹시 자신의 외사촌동생을 왕위에 올리려는 신라계 호족의 계략일지라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에 떨어졌습니다. 이 때 변방에서 지키고 있던 강조가 목종의 명을 받고 군사 5천을 일으켜 개경으로 옵니다. 그는 김치양이 불을 질러 목종이 목숨을 잃었고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경으로 향하던 도중 목종이 살아있다는 걸 알았지만 군사를 되돌리기엔 늦었다는 걸 알고 개경으로 향합니다. 결국 목종은 강조에 의해 폐위되었고 대량원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현종입니다. 
그럼 강조의 정변, 그것은 그의 단독의 결정이었을까. 천추태후가 자신의 출신지인 패서지역의 사람을 관직에 등용시키면서 기존에 있던 유학자 출신의 신하들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천추태후는 서경을 중요시하면서 고구려계승의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유학자 입장에서는 고려가 황제국을 지향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천추태후와 이전 성종대에 있었던 과거제출신 혹은 유학을 기반으로 한 신하들과는 정치노선은 정반대였던 것으로 아마 강조의 정변 이면에는 이러한 세력이 뒷받침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민심은 강조가 일으킨 정변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추태후와 목종의 하야에 대해 반대여론이 형성된 것입니다. 아마도 천추태후의 섭정기간동안 잘 돌 보았다라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천추태후가 죽었을 때 그의 능을 크게 지은 것을 생각하면 당시의 민심을 생각하여 예우를 해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현종은 천추태후가 추진한 일련의 정책들을 폐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성종이 폐지한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서경과 불교를 중시한 태조 왕건의 가르침도 계승한 것입니다. 
하지만 후대의 역사서에서는 천추태후가 욕망에 눈먼 음탕한 여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러한 것은 당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유교적인 잣대로 평가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천추태후는 고려의 전통을 되살리고 유연한 외교정책을 통해 고려를 지켜낸 당대 최고의 정치가입니다. 이제라도 고려의 천추태후의 평가가 제대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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