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의 2차 침입과 양규의 활약

2022. 8. 20. 08:0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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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8대 왕은 현종, 하지만 다시에는 현종보다는 그의 신하 강조의 힘이 컸습니다. 본래 강조는 목종의 명을 받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개경으로 향하던 중 목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는 잘못된 정보였는데 이를 알지 못한 강조는 한동안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목종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강조는 임금의 명을 받고도 군대를 움직이지 않은 꼴이 되어 난처하게 되었고 이렇게 된 바에야 쿠데타를 일으켜 대량군 순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현종입니다. 그리하여 실권은 강조에게 있던 것입니다. 
이 때 요나라는 송나라와 대전에서 우위를 점하며 중원을 차지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송나라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대로 성과를 거둔 요나라는 고려로 칼을 향합니다. 아무래도 송나라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고려를 제압해야겠다는 생각한 것입니다. 1차 침입의 결과로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고 송나라와 관계를 끊었다고는 하지만 비공식적인 교류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요나라를 신경 쓰이게 했습니다. 결국 요나라의 성종은 군대를 정비하게 되고 강조를 처벌한다는 명분 아래 출병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 출병에 여진족도 참여합니다. 그들은 고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현종은 요나라에 사신을 보내 출병을 멈추어 달라 했지만 한편으로는 통주에 강조가 30만 병력을 집결시킵니다. 사실상 요나라의 침략을 대비하고 시간을 끌면서 전쟁준비에 돌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2차 침입 때 동원된 거란의 병력은 40만 병력이었습니다. 1차 침입 때는 80만 병력이라고 했으나 사실상 믿기 힘든 기록입니다. 게다가 1차 침입 때에는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도통이 없었으므로 10만도 안되는 병력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2차 침입은 달랐습니다. 거란의 왕인 성종이 직접 참여했고 따라서 1차 침입 때보다 많은 병력에 정예병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나라가 고려를 침략하면서 꼭 들러야 하는 곳은 바로 흥화진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 곳을 기점으로 통주를 거쳐 서경으로 가는 길과 귀주를 거쳐 평산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으니 흥화진은 그 시작점이었습니다.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양규장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라의 공격에도 끄떡없자 요나라의 성종은 항복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냅니다. 하지만 통하지 않자 다시 공격에 들어갔습니다. 일주일 간의 공격은 실패로 끝이 났고 요나라는 흥화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흥화진에서 요나라군이 머뭇거릴 무렵, 귀주성 북쪽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요나라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번씩 승리와 실패를 경험한 요나라군은 강조가 지키고 있는 통주성으로 향합니다. 고려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진을 쳤고 수레에 창과 방패를 매달은 검차로 방어를 구축하였습니다. 요나라군대는 이를 뚫지 못하고 첫 전투의 승리는 강조의 고려군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후 야율분노가 이끄는 부대가 고려의 방어선을 뚫어내어 승리하게 되었고 거란을 얕본 강조는 사로잡히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현운을 비롯한 여러 지도부들이 함께 생포되었습니다. 고려군의 입장에서는 지휘관 여럿을 함께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기 힘들어진 고려군대는 요나라군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고려군은 곽주성 방면으로 도주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려군 입장에서는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도망가다 죽나 싸우자 죽나 마찬가지, 얼마되지 않은 병력으로 거란이 올 것 같은 곳에 매복하여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요나라군이 왔을 때 고려군의 기습이 이어졌고 요나라는 후퇴하였습니다. 요나라의 추가적인 진출은 일시적으로 막았으나 『고려사』에서는 3만 명이 전사했다고 나왔으므로 포로, 부상자, 실종자까지 합친다면 더 큰 피해를 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는 사이 거란은 생포한 강조를 회유합니다. 하지만 고문을 받으면서 그는 거란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와 달리 이현운은 거란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강조는 처형당합니다. 

강조가 붙잡혔으나 고려는 항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란군은 강조와 함께 생포한 사람 중에 노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을 통주성으로 보내 항복을 요구합니다. 통주성을 지키고 있던 중랑장 최질과 홍숙이 노전을 체포하고 결사항전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요나라의 공격, 하지만 통주성은 이를 막아냅니다. 결국 통주성을 놔두고 남하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곽주성으로 거란군대는 말머리를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 곽주방어사 조성유가 도망치는 바람에 곽주성은 요나라에 쉽게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을 함락한 요나라 성종은 성에 수비군 6천명을 남겨둔 채 남하를 명령합니다. 반면 고려의 조정에서는 화주 오늘날의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서 여진을 수비하던 지채문으로 하여금 서경을 구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리하여 지채문이 서경 일대에 요나라 부대보다 일찍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요나라는 삼수채전투에서 사로잡은 감찰어사 노이를 서경으로 보내 항복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서경의 지휘부는 갈등에 휩싸였고 요나라가 중흥사 탑을 불지르는 등 무력시위를 보이자 지레 겁을 먹고 서경부 유수 원종석이 항복문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한 조자기가 성문을 열어 지채문의 고려군대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원종석은 항복할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지채문은 항복문서를 가지고 요나라진영으로 가던 노이를 죽여버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항복하자는 쪽과 항전하자는 쪽이 대립을 보이는 사이 고려의 현종은 강화를 요청합니다. 아마 서경에서의 갈등 상황이 현종의 강화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사실상 항복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요나라 성종은 서경을 접수하기 위해 한기라는 장수에게 기병 200명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상황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절대 항복할 수 없었던 것인지 한기는 서경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들을 환영한 건 고려 군대의 기습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기가 포함한 1백 여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생포되었습니다. 

이에 요나라 성종은 다시 서경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고려의 군대와 맞붙게 되었습니다. 이 고려의 군대에는 법언이 이끄는 승병부대도 있었습니다. 요나라의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치열했고 요나라는 3천 명의 전사자를 냈습니다. 공성전이 아닌 들판에서 벌인 고려군의 첫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전투에서 요나라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고려군대가 어려움에 처했고 급기야는 서경이 포위당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요나라는 빈 절에 사령부를 차렸는데 거란에 멸망한 발해의 왕자 대광현의 아들 대도수가 이끄는 부대가 기습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이를 돕기로 했던 탁사정의 부대가 도주하는 바람에 대도수의 부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안의 상황은 결사항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라 군대가 이를 다시 공격합니다. 이 때 흥화진을 지키고 있던 양규 부대 700여 명의 결사대가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통주성의 병력까지 꾸려서 병력을 더욱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 병력으로 곽주성으로 들어가 요나라군을 몰아내고 고려의 백성들을 구해냅니다. 요나라 입장에서는 난처했습니다. 개경을 함락하지 못한 채 고려왕에게 확실한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요나라군대는 개경으로 향했고 개경의 고려조정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강감찬의 건의로 항복 대신 남쪽으로 피난가기로 하였고 지채문의 호위 아래 현종은 개경을 탈출합니다. 요나라군은 개경을 결국 함락했지만 왕은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현종이 무사히 탈출한 데에는 하공진이라는 신하의 공이 컸습니다. 그는 거란 진영에 가 담판을 벌여 “거란이 군대를 물리면 현종이 직접 황제를 알현할 것”이라는 말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하공진은 거란에 압송되었고 성종의 회유에도 충절을 지켜 결국 순국하게 되었습니다. 뚜렷한 성과없이 성종이 이끄는 군대는 퇴각하면서도 고려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그 중심에는 양규가 있었습니다. 양규는 대거란 2차 전쟁에서 7번의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3만 여명의 고려백성을 구해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하공진, 법인스님이 활약하였으며 고려의 백성들이 똘똘 뭉쳐 고려를 지켜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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