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평성대를 이끈 군주 문종
2022. 8. 22. 20:2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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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학자 이제현은 왕조의 전성기를 현종부터 그의 세아들 덕종, 정종, 문종시기로 보았으며 특히 문종시기가 태평성대였다고 전합니다. 문종은 1046년 2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현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원혜 태후 김씨의 아들이자 정종이 이복동생으로 누구처럼 섭정을 받을 일도 없었고 적당한 때에 왕위에 올라 고려를 살폈습니다. 이 문종은 호화로운 물건 대신 검소한 생활을 하여 모범을 보였으며 땅의 등급에 따라 세금의 차등을 두는 전품제를 도입하는 한편 흉년이 들 때면 가난한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백성도 없게 하기 위해 사형을 내릴 때에는 세 명의 관리가 철저히 조사하도록 하였습니다. 세 번 심사하도록 한 것도 문종 대의 일입니다.
문종은 불경을 서로 돌려가며 읽는 의식인 윤경회에 대해서도 손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성대하게 치르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대하게 치르는 의식을 백성들을 힘들게 하기 마련인데 따라서 윤경회 자체를 없애지는 않지만 사치스럽게 굴러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러면 한 쪽에서는 불평이 나올 법도 한데 위에서 말했다시피 왕이 몸소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니 할 말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의 검소한 처신은 왕실도 바꾸었습니다. 금은으로 장식한 용상을 구리와 철로 바꾸었고 금실과 은실로 꾸민 침전과 이불을 모두 무명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좌하는 환관과 내시도 줄여 30명만 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종이 당한 그런 사례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문종 대에 지방제도에 대해 손을 보게 되었는데 기존의 12주, 절도사제도를 폐지하고 5도호부, 75도로 나누어 안무사를 배치했으며, 이후 4도호부 8목 56지주 56군사 18진장 20현령으로 다시 개편하여 지방 지배력을 높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벌귀족이 섭섭할 수 있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립니다. 바로 문종 때 완성된 것이 바로 전시과입니다. 이 제도는 현직관료에게 토지를 주고 그 토지에 나오는 세금으로 나오는 곡식을 받을 수 있는 권리였습니다. 그리고 공음전이라 하여 5품 이상의 고위관료에게는 토지를 떼어주기도 했습니다. 이 공음전은 나중에는 세습되어 문벌귀족이 누리는 혜택이 되었고 이를 이용하여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종 대에 선상기인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는 지방 호족의 자제들을 개경에 모아 교육하는 제도로 기존의 기인제도에 변화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종 대에는 중앙의 힘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문종은 스스로를 황제라 하였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고려의 왕들 중에는 황제라 불리려고 했던 왕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종은 3성 6부제를 완성하고 신하들이나 공을 세운 이에게 공이나 후같은 지위를 주었는데 이는 바로 고려가 황제국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루어진 시스템이었습니다. 특히 문종의 시기에는 영토를 크게 확장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여진족도 지배하고 되었고 당시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기며 섬겼습니다. 여전히 거란은 골칫거리였지만 거란 입장에서도 고려는 부담스런 존재가 되었기에 커다란 침략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종 9년인 1055년에 벼슬에서 은퇴한 최충이 문헌공도를 세웁니다. 고려시대 때 공립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이 있었는데요. 최충은 후진양성을 위해 사립학교를 처음 세운 것입니다. 최충은 해주 향리의 아들로 태어난 인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문종 때에는 문하시중에 올라 고려의 안정기를 이끈 인물로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해동공자라고도 불렸습니다. 사실 문종 이전의 시기에는 거란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교육 분야에 힘쓸 겨를이 없었고 국자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최충은 문종시기의 안정기에 접어들자 사립학교를 세웠는데 9개 반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9재 학당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최충의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과거 급제자들이 많이 나왔고 이후 교육에 뜻이 있는 학자들이 저마다 학교를 세워 홍문공도, 정헌공도 등이 생겨 11개가 더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를 사학12도라고 불렀습니다. 이 곳은 국자감과 더불어 인재를 길러내는 양성소 역할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여기서 나온 인재들이 관료가 되어 문벌귀족사회이던 고려에 학벌이라는 또다른 안좋은 요소를 집어넣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안좋은 길로 들어서서 그렇지 고려가 문치주의를 나가는 데에 공헌한 것입니다.
문종 대의 최충의 활약은 고려 안에 유교 열풍이 불게 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고려는 불교국가입니다. 문종은 지나치게 유교가 세력을 떨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이에 친불교 인사를 활용하였으니 그가 바로 이자연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성종 때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습니다.
나라가 안정되면서 외국과의 교역도 잦아졌습니다. 그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 바로 벽란도입니다 벽란도는 예성강 하구에 있던 곳으로 물길로 타고 들어가면 개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였습니다. 벽란도를 통해 고려는 송나라와 활발한 교역을 이루었습니다. 송나라상인들은 고려에서 금과 은, 인삼, 도자기를 사갔고 고려는 송나라에서 비단과 약재, 서적을 구입했습니다. 송나라인들이 많이 드나들었으므로 송나라사신들이 머물 수 있는 순천관도 만들었습니다. 벽란도에는 송나라상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탐라인이 북적거렸으며 아라비아 상인들도 드나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가 아라비아상인들을 통해 Korea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종은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절을 창건하니 그 절이 바로 흥왕사입니다. 사실 왕실차원에서 절을 창건하는 것은 흔한 일이고 이것이 왕의 위엄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하지만 옛 기록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흥왕사가 완성되었으니, 무릇 2,800칸이었으며, 12년에 걸쳐 공사가 완료되었다”『고려사절요』문종21년
이런 문종은 현존하였더라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사찰 후보가 되었을 것입니다. 전체 부지가 아마 10만 평에 해당하는 넓이이고 한 때 2000칸을 자랑하던 불국사의 규모보다 더 큰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막대한 공사에 반대가 없었을까. 고려후기의 문신은 이제현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절의 높고 훌륭한 집은 궁궐보다 사치하고, 높이 쌓은 성은 나라의 수도와 비슷하여 황금으로 탑을 만들었으며 모든 시설들이 이와 비슷하였다. 이는 거의 양 무제와 비교될 만하다. 문종은 후대에 자신의 덕을 찬미하고자 하는 자가 이것에서 탄식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제현은 문종의 치세를 칭찬하면서도 흥왕사 창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의 초대 주지는 그 유명한 대각국사 의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종의 시기에는 반란에 대해서도 주동자만 강력하게 처벌하여 강한 반발을 무마시켰으며 송과 외교를 수립하여 거란을 견제하기도 하였습니다.
“문종 시대,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쌓였고 집집마다 살림이 넉넉하고 나라는 부유했다. 사람들은 이때를 태평성세라 불렀다” 『고려사』
문종은 절약과 검소를 몸소 실천했고 어질고 재주 있는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들을 사랑하여 형벌을 신중히 하였다. 또한 학문을 숭상하고 노인을 공경했으며 벼슬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지 않았고 비록 아끼는 자라 해도 공이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으며 총애하는 자라 할지라도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익재집』, 이제현
흥왕사 창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이제현은 그래도 선대왕들 중에서는 문종 시기를 고려 최고의 태평성대로 꼽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이 있다면 고려시기에는 문종은 그에 비견될만한 군주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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