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로 간 이유는
2022. 8. 24. 20:3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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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15대 임금 숙종은 조카인 헌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더욱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능력만 뛰어나면 신진가문이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관리로 임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든든한 지원이 된 것은 바로 숙종의 동생이자 승려인 의천와 파평의 신진가문 출신인 윤관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려 숙종 때의 기억할만한 일은 바로 이 때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동전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고려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시장에 가서 베를 갖고 가서 바꾸어야 했습니다. 나라의 세금도 쌀과 베로 걷었습니다. 물론 고려 숙종 이전 시기에도 화폐 역할을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종 대에 만든 철전과 숙종 때에 만들어진 은병이 있었습니다. 철로 만들어진 건원중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금속화폐였지만 녹이 쉽게 슬었고 활구라고 불리는 은병은 가치가 너무 높아서 지배층 사이에서만 쓰였습니다. 그리하여 보다 유용하고 활용성이 높은 화폐를 유통하기를 의천이 건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윤관의 지휘 아래 화폐가 만들어졌으니 동으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동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에 널리 통용되는 보배라는 의미로 해동통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동전은 녹이 잘 슬지도 않았고 가치도 철전보다 높고 은병보다는 낮아서 쓰기에 적당했습니다. 그리고 개경과 서경에 상점을 열어 동전으로 술과 음식을 사먹을 수 있도록 하고 화폐의 편리함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화폐는 고려사회에 널리 퍼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려사회가 당시 화폐가 유통될만큼 충분히 상공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폐를 쓸 일이 많지 않았고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은 베와 쌀을 이용한 거래에 익숙했기 때문에 동전을 잘 쓰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동전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많이 쓰이게 되었습니다.
동전의 유통을 건의했던 승려 의천은 출가한 지 불과 3년 되던 해인 13세의 나이에 최고의 승직인 승통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가 어린 나이에 승통의 자리 오른 사실은 잘 부각이 되지 않습니다. 그의 출생이 어땠길래 13세의 어린 나이에 승통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대각국사는 왕후로 문종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문종은 여러 아들들에게 누가 중이 되어 부처에게 베풀겠느냐고 물었을 때 의천이 승려가 될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승을 따라 영통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럼 문종은 자신의 아들에게 왜 승려가 되기를 권유했을까. 당시 고려의 국교는 불교였고 승려가 된다는 곳은 출세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절은 유력한 경제집단으로 왕실을 비롯한 귀족가문들은 경쟁적으로 자식들을 출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승려를 통솔하는 최고의 지위에 왕이 입김이 작용한 것입니다.
의천은 매우 똑똑하고 학문을 즐겼습니다. 그는 『화엄경』을 배우니 5교에 통달하고 동시에 유교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불전을 수집하여 이를 간행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고려종교계의 문제인 파벌을 해결하기 위해 송나라에 가서 천태종을 배워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의천은 송나라로 가서 불도를 탐구할 것을 여러 번 건의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고 선종 때에 이르러 여러번 청하니 재상과 간관들이 그것을 불가하였습니다. 그들은 의천의 송나라행을 반대한 것은 왕자의 신분으로 먼 바닷길을 나서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하였으나 실질적인 당시 국제적인 정세에 따라 대신들은 반대하였습니다. 당시 요나라와 송나라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때에 고려의 왕자가 송나라로 갈 경우 고려와 요 사이의 외교적인 마찰이 있을 수 있으므로 당시의 문벌귀족들이 반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종 2년인 1085년에 그는 몰래 두 명의 제자와 함께 송나라 상인 임녕의 배를 타고 송나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고려와 송은 공식적인 외교관계는 맺지 않았으므로 송상의 힘을 빌려 밀항하게 된 것입니다. 왕은 이에 놀라 여러 배로 나누어 뒤쫓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의천은 송나라로 도착하니 황제가 수공전에 그를 접견하였고 후하게 대접했습니다. 송나라에서 그를 후하게 대접한 것은 나약했던 송나라의 군사력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라보다 열세였던 송나라는 고려를 이용해 요를 견제하려 하였고 따라서 의천을 환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이에 대해 송나라 대신의 반대도 있었으니 대표적인 문인 소동파로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고려사신에 대한 대접에 과도한 비용을 쓴다는 것이 바로 이유였습니다. 그러한 이유에도 왕안석의 신법당은 고려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견제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책을 내세웠습니다. 따라서 고려 왕자 의천은 여행하면서 불법을 탐구할 것을 원하니 황제의 명령으로 주객원외 양걸의 안내를 받으며 강소성, 절강성의 여러 절에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항주의 혜인원에서 정원이라는 승려로부터 화엄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의천은 불경 170권 3부를 기증했고 이 후 혜인원은 고려사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의천은 이후 천태종 교리를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려에 돌아가면 천태종 개창을 맹세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왕은 송나라의 글을 보내 의천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황제는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수많은 불교 서적을 가지고 의천이 다시 예성강에 이르니 왕은 태후를 모시고 그를 영접하였습니다. 의천은 불결 1000권을 바쳤으며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하니 요나라와 송나라에서 4천 권에 달하는 서적을 구입해서 모두 간행하였습니다. 중국과 거란, 신라, 고려에서 저술된 불교전적들을 모두 모아 총서형태로 간행을 한 것으로 대승불교문화를 총정리하는 문화사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속장경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일본학자에 의해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합니다.
의천은 이에 고려에서 천태종을 열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천태종은 6세기의 중국의 승려 지의가 거주하며 가르침을 폈던 중국 동남부의 산에서 유래된 종파로 이 종파의 기본법전은 법화경이므로 법화종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이미 천태종이 들어왔습니다.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인 아니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파로 성립시킨 것입니다. 의천이 이러한 일을 한 이유는 화엄종과 선종을 결합하여 제 3의 종단을 만들려고 함이었습니다. 이에 인주이씨가 주도하는 법상종 세력은 이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숙종이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름으로써 의천의 천태종을 개창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국청사를 본산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화엄종과 선종의 통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전부터 있었던 불교종파 간의 갈등을 봉합하려고 했던 숙제를 의천이 해결책을 내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지눌의 선교통합의 작업도 있게 한 것입니다.
한편 의천이 흥왕사에 있을 무렵 요나라에서 사신이 왔는데 요나라 사신 왕악이 흥왕사의 작은 종을 보고 경탄하며 자기네 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하자 의천이 왕악에게 황제가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다고 하니 이 종을 바치겠다고 하여 왕악은 이에 찬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의천은 금종 두 개를 주조하여 요나라 황제에게 선물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답례사로 가는 이복에게 부탁하여 이 뜻을 요나라 황제에 전했는데 요나라 황제는 왕악이 사신으로 가서 마음대로 재물을 요구하였으니 이를 벌할 것이고 종은 바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의천이 병에 들어 왕이 총지사로 문병갔으나 곧 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그에게 대각이라는 시호를 주려고 하였는데 중서문하성에서는 대각이라는 말은 부처를 뜻한다고 하여 이름을 외람되게 쓰면 안된다고 하였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에게 대각국사로 추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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