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

2022. 8. 26. 20:1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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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의 난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벼슬길에 올라 최고위직에 올랐고 그의 딸 3명은 문종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자연의 권세는 엄청 높았습니다. 이후 12대 순종과 13대 선종에서도 경원 이씨 가문에서 왕비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경원 이씨 가문의 권세를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습니다. 이후 14대 헌종과 15대 숙종은 경원 이씨 가문와 딸과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경원 이씨 가문의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원 이씨인 이자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바로 16대 예종 대의 일입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관직에 있었으므로 그 역시 벼슬길에 올라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는 이전에 여동생과 사촌형제가 왕실과 문제를 일으켜 이자겸 본인은 이로 인해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후 이자겸은 자신의 둘째딸을 예종의 왕비로 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공로로 공신이 되고 백작벼슬까지 받았습니다. 이렇게 말썽을 일으킨 이자겸과 예종이 다시 손을 맞잡은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때 이자겸이 그 뒤를 받쳐주어 아무 탈없이 이어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종이 사망한 뒤 왕위를 노리는 인종의 숙부들이 있었는데 당시 인종이 미성년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자겸은 힘을 써주어 자신의 외손자인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인종은 예종의 맏아들 왕해가 왕위에 오르면서 이자겸은 최고의 벼슬과 함께 조선국공이라는 벼슬도 얻었습니다. 바야흐로 이자겸의 시대가 열렸으니 인종이 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인종은 더욱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자겸은 자신의 권세가 올라갔고 궁궐에 나아가 임금에게 조서를 받는 것도 귀찮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고려의 국왕이 직접 건덕전 문밖까지 나가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이에 나아가 이자겸은 자신의 높은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두 딸을 인종과 결혼시키려 했을 때 군말없이 따라야 했습니다. 인종입장에서는 자신의 이모와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왕실에서의 근친혼은 흔한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이자겸이 권력유지를 염두에 두고 벌인 정략적인 결혼이라는 인상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제인 것은 이러한 이자겸의 권세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자겸은 자신에게 방해가 될만한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종의 아우인 왕보와 한안인, 문공미 등을 유배 보낸 것인데 이들이 모의하여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자겸은 문신과 무신의 인사권을 장악하여 자신의 아들과 측근들을 주요 보직에 앉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자겸의 문을 뇌물이 드나드는 통로였으며 백성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이자겸의 종들도 그 권세를 믿고 남의 마차를 빼앗아 몰 정도였습니다. 이자겸은 스스로 국공에 올라 자신을 왕과 동일시했으며 자기 생일은 인수절이라 불렀습니다. 인수절은 국왕의 탄신일에 붙이는 명칭이었으니 고려국왕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자겸은 자신의 권세를 염두에 두고 외손자인 인종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1126년, 이에 골치가 아파진 인종은 이자겸을 귀양보내기 위한 시도를 합니다. 이자겸의 최측근은 척준경이었으며 그의 동생 척준신이 자신이 국방장관이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이에 인종은 모의하여 김찬, 안보린, 최탁, 권수 등이 나서  척준신을 제거하였고 이 과정에서 척준경의 아들인 척순도 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 가담했던 한 사람이 이자겸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면서 사건은 커지게 되었습니다. 척준경이 분노한 것입니다. 척준경은 군인과 부하들, 그리고 현화사의 승려 300여 명을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합니다. 이른바 역사에서 말하는 이자겸의 난인 것입니다.  이 난리에 인종은 신봉루라는 곳에 올라가 피신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를 둘러싼 척준경의 부하들이 인종을 위협했습니다. 척준경은 일이 쉽게 돌아갈 것 같지 않자 아예 궁궐을 불태우기로 합니다. 이에 따라 인종은 도망쳐 나왔고 인종을 따르던 수많은 신하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에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인종은 이 사건 이후에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인종은 여러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옥새를 이자겸에게 넘기기로 합니다. 옥새는 국왕을 상징하는 인장이므로 이것을 넘긴다는 것은 바로 왕위를 넘긴다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고려의 왕조가 왕씨에서 이씨에서 넘어가는 순간, 이자겸의 6촌 쯤 되는 이수라는 자가 이자겸의 손을 잡고 주상의 조서가 있더라도 이자겸 공은 충성을 다할 분이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말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이자겸이 옥새를 받기가 이상해졌습니다. 그는 억지로 사양하는 척 하며 옥새를 되돌려 줍니다. 이 일로 왕위가 이자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나 이자겸은 왕위를 찬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분해했습니다. 급기야는 억지로 왕위를 빼앗겠다는 생각이 더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넷째 딸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자겸의 넷째 딸은 인종의 이모이자 부인으로 인종과 잘 지냈기 때문에 이를 잘 이용하면 인종을 처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이자겸이 넷째 딸에게 독이 든 떡을 넘겨주며 인종을 위해 만든 떡이니 갖다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귀함 음식이니 꼭 인종만 먹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으니 이는 넷째 딸의 의심을 샀습니다. 인종의 부인이던 넷째 딸은 인종에게 건네주기 전에 인종이 보는 앞에서 떡이 상한 것 같다며 뜰 아래에 떡 한 개를 버립니다. 그리고 그 떡을 보고 달려든 새가 먹고는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왕비의 슬기로 인종은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자겸은 왕이 왜 떡을 다 안드셨는지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후 이자겸은 인종의 건강이 좋아보이지 않는다며 탕약을 달 여왔습니다. 이번에는 이 약을 잘 갔다드리는지 이자겸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비는 문지방에 일부러 걸려 넘어지며 탕약을 엎지른 것입니다. 이를 본 이자겸은 독살로 인한 제거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척준경과 이자겸 사이에 서서히 틈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자겸이 척준경을 무시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책임을 척준경에게 전가한 것입니다. 척준경은 자신의 아들과 동생을 잃은 마당에 이자겸이 보이는 자신에 대한 자세가 섭섭했습니다. 한편 인종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치의인 최사전과 모의하여 척준경과 이자겸의 사이를 이간질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척준경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자겸을 없애주면 궁궐을 불태우고 화살을 날린 죄를 없애주기로 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자겸 아들의 하인이 척준경의 하인에게 척준경을 흉 본 일이 있었습니다. 이자겸 아들의 하인이 척준경의 하인더러 척준경의 궁궐을 불태웠으니 죽어 마땅하고 척준경의 하인더러 관노가 될 거라고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에 척준경은 매우 심기가 불편하던 차였습니다. .이에 속은 척준경은 이자겸에게 등을 돌리고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로 하고 군인을 동원하여 이자겸과 그의 자식들을 감금하였으니 이자겸의 반란은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종의 왕비인 이자겸의 딸들도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척준경도 탄핵을 받아서 암타도라는 섬으로 귀양가게 되었습니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몰아내는 데에 공을 세웠지만 궁궐을 불태우고 왕을 해치려 한 죄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이자겸과 척준경을 몰아내고 안정을 찾은 고려조정에서는 신하들이 왕비 이씨들도 역적의 딸이니 벼슬을 떼고 궁궐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여 폐비에는 동의해야 했으나 인종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하여 집과 밭과 노비를 하사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자겸의 난으로 일시적으로 고려 왕실은 안정을 되찾는 듯 했지만 문벌귀족의 모순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주 이씨를 대체하는 신흥 문벌귀족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결국 이들간의 권력다툼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결로 이어지며 고려는 정치사회적으로 기강이 크게 흔들렸고 이 때 수반된 지나친 문치주의는 향후 있을 무신정변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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