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구한 서희의 외교담판

2022. 8. 17. 20:2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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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얼마 되지 않은 942년, 거란에서 30여명의 사절단이 낙타 50마리를 데리고 도착합니다. 하지만 당시 태조 왕건은 거란의 사신들을 귀양 보내고 50마리의 낙타를 만부교에 묶어 굶어 죽게 합니다. 당시 태조 왕건의 이러한 정책에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훈요 십조」에서도 거란을 멀리하라고 언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악의적인 목적이 없이 온 사절단을 귀양보내고 그 동물들을 굶어죽게 했던 행동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행동입니다. 고려의 건국초기에 발해의 태자인 대광현이 수많은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귀순해 옵니다. 아마도 이들의 세력이 자못 무시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이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이런 일을 벌엿는지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개운치 않은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실제로 이들이 이후의 역사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는지 알 수는 없거든요. 다만 태조 왕건은 이들을 군사적인 협력관계로 이용하려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태조 왕건이 죽고 나서였습니다. 거란은 강성해지고 있었습니다. 거란에 대비한 군대가 조직되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란은 처음부터 고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993년 소손녕의 이끄는 거란의 군대가 고려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침략이 있기 3개월 전에 이미 여진족이 거란의 동태를 고려에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이러한 침략정보를 무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려로 침략해온 거란의 군대는 봉산성 전투에서 고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면서 거란은 고려에 항복문서를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합니다. 그러면서 침략의 이유를 두 가지를 댔습니다. 하나는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고려가 그 땅을 침범하였으니 이를 토벌하는 것이요, 둘째는 거란이 사방을 토벌하고 있음에도 고려가 이에 응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항복을 요구한 것입니다. 
당시 고려의 임금은 성종이었습니다. 그는 서경에서 대책회의를 열게 되는데 내용은 어떤 방법으로 거란에 항복할 것인가였습니다. 어떻게 싸우느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에 신하들은 무조건 항복하자는 의견과 절령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땅에는 여진족이 많이 살고 있으므로 떼어주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종은 서경에 있는 창고를 열어 백성들이 그 식량을 가져가게 하고 남아 있는 식량에 대해서는 대동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텅 비어있는 서경을 거란에게 보여주어 스스로 물러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령 이북의 땅을 떼어준다고 해도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땅을 넘겨주고 나면은 개경이 국경과 가까워지기 때문에 수도 천도가 불가피해지고 거란이 영토를 넘겨달라는 요구를 더 해올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이도 저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란의 군대가 이상했습니다. 80만 대군을 이끌고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더 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것은 당대 재상 서희였습니다. 서희는 19세 때인 960년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972년에 송나라로 건너가 외교관계를 복원하는 데에 기여를 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는 거란이 전쟁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실 거란군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보급문제에 차질이 있었고 안융진을 공격했다가 발해유민을 이끌고 있던 발해 태자 대광현에게 패했기 때문입니다.  
서희는 고려의 결정에 반대합니다. 그는 식량이 충분하면 성을 지킬 수 있고 싸움에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식량을 버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지금 거란의 목적은 다른 것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거란의 동경에서 고려의 안북부에 이르는 곳은 본래 여진이 살던 곳인데 광종 때 이를 빼앗아 가주와 송성을 쌓은 곳으로 거란은 이를 차지하려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거란 역시 우리 고려와 싸우는 것에 부담스러워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땅을 떼어주는 것은 대대손손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며 판단을 보류하자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하 이지백도 거들었습니다. 이지백은 유교문화로 인해 정신이 나약해져서 함부로 땅을 내어주려 한다고 비판합니다. 서희의 이러한 의견에 거란군의 화만 돋울 것이라고 반대한 신하도 있었으나 서희에게 군대를 주어 일을 맡겼습니다. 

서희의 외교담판

서희는 이 때 즈음에 거란과의 협상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을 만났습니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 오자 소손녕은 거만하게 굴며 자신은 대국의 귀인이므로 뜰에서 절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서희는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면 모를까 양국의 신하들이 마주하는 자리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며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거란이 차지했는데 고려가 이를 침범한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란과 고려는 땅이 이어져 있는데 고려는 거란과 통하지 않고 송나라와 통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이러한 고려의 처사가 오늘날의 출병이 있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땅을 떼어주고 황제에게 알현할 사신을 보내야 무사하다고 협박한 것입니다. 이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이요, 그리하여 나라이름도 고려이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거란이 차지하고 있는 땅도 본래 고려의 것이니 고려가 그 곳을 침범하였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받아칩니다. 또한 압록강 안팎도 고려의 경내인데 여진족이 이를 차지하고 있어 거란과의 길을 막고 있어 사신을 보내지 못해 황제를 알현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 곳을 찾아 성을 쌓고 길이 통한다면 어찌 사신을 보내지 않겠느냐며 이 말을 천자에게 전해달라고 합니다. 이 말은 거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고려의 입장을 설명한 이야기로 거란의 군대를 물러가게 할만한 명분을 주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소손녕은 거란의 성종과 의논한 뒤, 고려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낙타 10마리와 말 100필, 양 100마리등 많은 가축과 500필의 비단을 주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서희는 외교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얻어냈다.

서희의 외교담판은 거란군을 돌아가게 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의 여섯 근거지에 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켰으니 이른바 강동 6주인 것입니다. 그 결과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까지 넓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 대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서희는 이에 더해 북진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성종이 이를 말렸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평화도 얻고 영토도 확장하는 역사적으로 길이남을 만한 외교협상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이러한 서희에게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그의 강직한 일화가 더 있습니다. 때는 983년, 서희는 병관어사로 임명되어 왕을 수행해 서경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경에 온 성종은 금수산 영명사에서 풍류를 즐기고자 했습니다. 금수산이 아름답다고 소문났기 때문입니다. 이를 말린 것은 서희였습니다. 서희의 말에 성종은 옳다고 발길을 돌립니다. 왕의 질책을 각오한 서희의 용감한 처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일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공빈령 정우현이 일곱 가지 바로 다스려야 할 일을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이에 성종은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정우현이 직책에 벗어난 일을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벌을 주고자 할 때에도 서희가 말리며 오히려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재상의 자리에 앉아 헛되이 녹만 먹고 있어 직분이 낮은 자가 정사의 성패를 논하니 이는 자신의 잘못이라며 오히려 정우현의 일은 정당하여 상을 주어야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거란과의 외교담판에서 보인 용감한 행동은 평상시 그의 모습이며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더욱 빛을 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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