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의 난으로 둔갑한 고려 왕자의 난
2022. 8. 15. 20:1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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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은 장남은 무를 태자로 삼았으니 그 때가 921년의 일입니다.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자를 점찍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그가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여러 세력가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에 따라 한반도 왕조 역사상 가장 많은 부인은 거느렸고 따라서 많은 아들도 둘두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죽고 난 후 왕위쟁탈전이 벌어질 수 있으니 이를 대비하고 후계자를 선정한 것입니다. 그래도 태조에게는 여전한 근심거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태자 무의 외가집안이 세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를 태자로 내세울 때 반발도 예상했던 것입니다. 태자 무는 태조의 제 2비 오씨의 아들로 나주출신 다련군의 딸입니다. 그의 집안이 다른 집안에 비해 세력이 약하여 임신을 원하지 않았으나 오씨가 억지로 임신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사실 오씨가 제2비이니 첫 번째 왕비도 있었을 텐데요. 1비 신혜왕후와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오씨의 아들 무는 태조의 장남이므로 그가 왕위를 이을 명분을 충분했습니다. 이에 태조는 낡은 상자에 자주빛이 나는 황포를 담아 오씨에게 주었고 오씨는 이것을 다시 박술희에게 보였습니다. 박술희는 뜻을 헤아려 오씨의 아들 무를 태자로 삼자로 건의하였고 이에 태조는 박술희에게 군국의 일을 부탁하며 오씨의 아들 무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왕건은 후사를 정하면서 박술희와 함께 경기도 광주 출신의 호족 왕규를 후견인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왕규는 왕건이 궁예 밑에 있을 당시 광주를 정벌할 때에 왕건에게 협조하며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두 딸은 왕건의 15번째, 16번째 왕비였으니 왕건의 장인이었으며 그의 또다른 딸은 태자 무에게 시집갔으므로 혜종의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태자 무가 세력이 약한 집안이라고는 하나 박술희와 더불어 광주를 근거지로 사병을 거느리고 한강의 수운을 장악하여 경제력도 가지고 있는 강력한 호족 왕규로 하여금 혜종을 돌보도록 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왕건은 당시 군사권을 쥐고 있던 임희의 딸을 태자비로 간택했으니 태자 무가 왕위에 올랐을 때 안정화에 기할 수 있도록 태조 왕건 입장에서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셈입니다.
“혜종이 병을 앓자 왕규가 딴 뜻을 품었다. 정종이 왕식렴과 함께 은밀히 변란에 대응할 계책을 모색했다.” 『고려사』
왕규가 딴 뜻을 품었다니 무슨 뜻일까요. 사실 왕규는 혜종의 동생인 요와 소가 반역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혜종에게 이를 알렸지만 혜종은 그것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딸을 소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잘 대접하였습니다. 이에 당황한 왕규는 그에 반격으로 혜종을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2번의 걸쳐 시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럼 반역을 꿈 꾼 요와 소는 어떤 사람일까요. 이들은 후에 정종과 광종이 되는 고려 3대왕과 4대 왕입니다. 이들은 충주유씨 신명순성왕후의 아들들로 강력한 호족세력의 자제였는데요. 당시 충주 유씨의 권세가 워낙 막강하여 그의 권유로 강릉의 세력가 왕순식 군대가 고려에 귀부하였고 후에 후백제군을 격파할 때 활약한 부대도 충주 유씨와 왕순식의 부대였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호족이었으며 왕위를 노리는 다른 아들들에게는 부담스런 상대였습니다. 왕위를 노리던 왕요와 왕소의 뒤에는 충주 유씨 가문이 있었고 이들은 또한 서경 세력이 왕식렴과 연결되었으니 막강한 권력라인이 구축된 셈입니다. 그것이 부담되었을까. 왕규가 왕요·왕소 형제가 반역을 꾸민다고 했을 때 오히려 혜종은 자신의 딸을 주어 무마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건 고려왕이었지 왕의 사위가 아니었습니다.
“혜종이 병석에 눕자 왕규를 미워해 다투던 박술희는 군사 100여 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정종은 박술희가 딴 뜻이 있음을 의심하여 갑곶으로 귀양보냈다. 이것을 빌미로 왕규가 왕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
“혜종이 병을 앓자 왕규가 딴 뜻을 품었다. 정종이 왕식렴과 함께 은밀히 변란에 대응할 계책을 모색하였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의 군대가 평양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호위하니 왕규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왕식렴은 왕규와 그 일당 300여 명을 죽였다.”
왕식렴이 죽인 왕규의 일당이 300여 명이었다는 사실은 왕규는 엄청난 세력가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태조왕건은 혜종을 잘 보좌해달라고 왕규와 박술희에게 맡겼는데 오히려 이들은 서로 간에 균열이 생겼고 왕규는 박술희를 귀양보낸 뒤 제거하였으며 왕규는 왕건의 제 16번째 부인이 낳은 아들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가 왕식렴에 군대에 제거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규의 난입니다.
사실 왕규의 난이라고 사서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혜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꿈꾸던 배다른 동생 왕요와 왕소가 그 꿈을 실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박술희와 왕규의 갈등을 이용하여 박술희를 귀양보내도록 하였고 이후 왕규가 왕요와 왕소의 음모를 혜종에게 알렸으나 이내 무시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왕규의 대응책 즉, 광주원군을 왕으로 올리려는 계획은 왕요와 왕소가 정변을 일으켜 왕규를 제거하는 명분을 제공하였으니 왕규의 난 이면에는 왕요, 왕소 형제의 난이라는 이면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왕규의 난은 왕건이 우려한 사태가 현실화되어버린 셈입니다. 즉, 태조 왕건의 호족포섭정책은 후삼국통일의 밑바탕이 되었지만 이것이 왕위쟁탈전의 씨앗이 될 수 있었는데요. 왕건은 이것을 방지하고자 했지만 실패한 셈이죠. 왕규의 난은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위로 올려리다가 실패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왕건이 우려한 호족간의 권력싸움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혜종이 일찍 병사하고 그의 후견인인 박술희와 왕규가 제거된 것은 경기도 광주의 호족세력과 당진의 호족세력의 몰락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는 세력이 있으면 주도권을 잡은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와 소 형제가 왕위에 오르게끔 도와준 왕식렴의 서경세력입니다.
사실 2대왕 혜종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요. 태조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던 시절에 나주에서 배를 정박하고 행군하던 도중에 우물가에서 오씨를 만나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왕건은 오씨를 비천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씨를 주지 않기 위해 밖에다가 정자를 배설합니다. 오씨가 이것을 찍어 넣어서 아이를 임신하여 낳았으니 그가 바로 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돗자리무늬가 배어 혜종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이를 임신했다고 치더라도 사람의 얼굴에 그러한 이유로 주름이 많아진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 충주 유씨와 홍주 황보씨 계열의 호족이 터뜨린 헛소문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또한 왕규는 혜종에 대한 암살 시도를 2번이나 시도했으며 그 중 한번은 자객이 깨어난 혜종의 주먹에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기록입니다. 혜종은 자기를 두 번이나 죽이려 한 왕규를 살려주고 몸이 안좋을 때도 자다가 자객을 한방에 때려 눕힙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위를 노린 또다른 인물, 광주원군도 내버려두었습니다. 아마 박술희도 왕규가 아닌 서경파에 의해 제거당했을 것입니다. 박술희의 군사적 기반은 서경세력에게는 두려움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왕규의 난은 승리자에 의한 시나리오일 수 있습니다.
혜종은 후계자를 미처 정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불과 30대 초반의 나이였습니다. 태자시절에는 후삼국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울 정도면 무인기질도 있던 혜종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병사했다고 하는데 따라서 병사했다는 기록마저 의심하게 합니다. 어쩌면 혜종은 서경세력에 의해 독살 혹은 암살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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