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의 개혁과 숙청, 효과적이었나.
2022. 8. 13. 21:31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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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4대 왕으로 정종의 동생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광종입니다. 태조 왕건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은 도합 6년에 불과할 선대왕들은 치세는 불안했습니다. 진실이야 어찌되었든 두 선대왕에 대해선 병사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치열한 권력투쟁을 보았으니 광종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외국인우대정책을 썼ㅅ브니다. 이러한 광종의 정책에 대해 너무 지나쳤는지 당대 원로정치인 서필은 이렇게 왕에게 이렇게 간언하였습니다.
“투화인(귀화인)들이 벼슬과 집을 차지하여 기존의 신하들이 살 곳을 잃었습니다. 신에게 그동안 받은 녹봉으로 작은 집을 지어 그 신하들과 나눠 살겠습니다.”
이는 광종의 지나친 외국인관료우대정책에 비꼰 말로 성격이 불같았던 광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서필의 이 말을 광종은 충언으로 알아듣고 다시는 다른 신하들의 집을 빼앗아 외국인관료에게 주는 일을 없앴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광종의 개혁정치는 기존세력의 반발을 살만큼 거세게 일었으며 따라서 지배층의 여론도 좋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후의 문신 최승로가 광종을 비판한 것인데 중국의 것을 중하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좋은 것은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전했습니다.
이러한 광종의 개혁정책, 특히 외국인 우대정책에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쌍기일 것입니다. 955년에 고려에서는 후주에 사신을 보낸바 있는데 이후 후주의 2대왕 세종이 그에 대한 답례로 설문우라는 신하를 보냈고 그와 함께 수행원으로 따라온 사람이 쌍기였습니다. 쌍기는 후주의 세종을 보좌하면서 그의 개혁정책에 동참하여 성과를 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유랑하는 농민들을 위해 논과 밭을 환원해주는 정책을 폈으며 무신을 대거 등용하여 지방의 무벌들을 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고려 광종은 세종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를 원보한림학사로 임명, 개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당시 광종은 쌍기에게 엄청난 신뢰를 보냈던 바 이를 본 최승로는 그에 대한 은혜가 너무 융숭하다며 비꼬았습니다. 하지만 광종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쌍기는 광종이 그토록 원했던 인재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개혁을 원했던 광종의 첫 번째 과제는 호족들의 기를 꺾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행한 것이 바로 956년에 실시된 노비안검법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호족들의 힘을 빼놓겠다는 광종의 결단으로 서경출신세력의 대변인이자 부인인 대목왕후가 광종에게 노비들이 호족을 멸시하게 되므로 나라의 안정을 해치게 한다며 그만 둘 것을 이야기했으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 호족들은 어떻게 불법적으로 양인을 자신의 노비로 만들었을까. 후삼국시기에 전쟁 과정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노비가 된 자들이 많았고 호족이 강제로 노비로 삼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엄청난 토지들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 노비들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게 하고 수확물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또한 세력가들의 군인으로 편성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노비들은 호족들의 경제기반이자 군사기반이었습니다. 따라서 노비안검법의 실시는 호족에게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흔들어 놓겠다라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양인이 늘면 국가의 재정이 탄탄해지고 군사력 강화에도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농민의 마음까지 헤아려 준 것이니 민심도 얻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호족은 싫어할 수밖에 없는 정책이지만 농민들에게는 환영받는 정책이었습니다. 물론 부작용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목왕후의 말처럼 되었는지 어떤 노비는 양민이 되고 싶어서 주인을 거짓으로 고발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제도든 초기에는 혼란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고려에 귀화한 쌍기가 광종에게 건의한 제도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과거제도입니다. 과거제도는 중국 수나라의 문제가 처음 실시한 것으로 10세기 이후에는 송나라 때 정비되어 청나라까지 시행된 제도였습니다. 고려초기에는 공신들과 호족들로 인해 그들을 대우해줘야 하는 상황에서 고려왕실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들을 우대해줌으로써 고려왕조는 유지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이들의 자식들은 부모덕에 쉽게 출세하였기 때문에 왕권 강화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광종은 능력위주의 관리채용이라는 목적 아래 과거제를 실시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지기반을 얻어 왕권강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특히 과거제에서는 무신을 뽑는 무과가 없었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무신들이 정계에 진출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문신을 뽑는 과거제를 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과거제에서는 무신을 뽑지 않았던 탓에 후에는 문신들이 무신들을 무시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과거제의 실시로 고려는 능력으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음서제가 자리하여 기존의 관리의 자제들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 역시 열어놓았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는 건국초기의 호족중심에서 문벌귀족중심으로 지배층이 옮겨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가문에 의한 권력독점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광종의 숙청작업이었습니다. 960년에는 평농사사 권신이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의 역모를 고한다.”며 참소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해당신하들이 귀양을 갔고 이후 고발이 줄이어 많은 사람들이 귀양 가거나 죽음을 당했으며 이로 인해 감옥이 꽉차서 임시감옥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광종에게 숙청을 당한 사람 중에는 혜종의 아들인 흥화군과 정종의 아들인 경춘원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왕주까지 의심하였으니 광종의 재위기간은 신하들은 엄청난 압박에 시달려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15년간 이어진 광종의 공포정치로 인해 자신도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신의 경호부대를 늘리는가 한편 과거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발하면서도 그 중에는 공신이나 호족 출신의 자제는 거의 없었다고 하니 기존세력 누르기에 철저했던 것입니다. 건국 초기의 고려는 여러 가지로 불안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은 필수였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반된 숙청작업에 대해 고려가 호족연합정권에서 제대로 된 중앙국가로 나아갔다는 평가가 있지만 이러한 광종의 정책이 후대 왕들에게 부담으로 작용되었고 한편으로는 얼마나 실효성을 거두었는지 의구심을 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광종의 개혁은 분명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쌍기를 등용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능력있는 외국인을 임금이 등용하는 것이 뭐 특별할 것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자신을 보좌하는 국무총리나 혹은 장관직에 귀화외국인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역사에서도 그러한 예는 극히 드문 것입니다. 반면 고려에서는 그러한 예가 생각보다 많으므로 거란 출신 위초, 발해 출신 유충정을 포함한 수많은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 중 쌍기는 고려에서도 높은 벼슬에 올랐고 광종의 대대적인 숙청작업에서도 그가 제거당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광종은 쌍기를 상당히 신뢰하였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광종의 숙청작업을 막을 수 있던 사람도 쌍기였을지도 모르나 광종은 한 번 마음먹으면 밀어붙이는 성격이었으므로 쌍기조차도 과종을 제어하기 위해 참소를 하는 것도 부담되었을 것입니다. 고려말 학자 이제현은 광종이 과거제를 실시하여 문신들을 등용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으니 쌍기도 이런 훌륭한 일에 보탬이 되었다고 칭송하였습니다.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호족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획기적인 조치였으며 그의 과거제 실시는 고려에 문치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숙청작업은 고려의 정치판 물갈이로 이어졌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광종에게 지나치다며 비판하겠지만 이러한 개혁 속에서도 일반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정책을 구사하지 않은 점도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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