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종의 무리수 서경천도

2022. 8. 12. 21:2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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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 속의 고려 정종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에게는 29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29명의 부인들이 모두 왕건과 사랑을 나누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바꾸어 이야기한다면 기록상의 수치이므로 더 많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왕건은 왜 이렇게 많은 여인들과 인연을 맺어왔던 것일까요.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왕건은 혼인정책으로 인해 34명의 자녀가 두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아들이 25명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아들들은 서열에 차이가 있을 뿐, 어찌되었든 왕이 될 수 있는 명분이 있던 셈입니다. 호족입장에서는 자신의 외손자가 고려의 왕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걸 기대한 호족이 한 둘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혼인정책은 왕건 특유의 포용정책의 하나였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일정기간동안 정국을 불안케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왕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과 정종의 재위기간이 짧았던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은 언제 왕위에 뺏길지 모르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기록에서는 노골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이 바로 왕규입니다. 왕규는 태조 왕건의 열다섯 번째 왕비와 열여섯 번째 왕비의 아버지로 왕건에게 두 딸을 시집보낸 장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여섯 번째 왕비가 아들을 낳으니 광주원군이었습니다. 왕규는 이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왕규는 혜종에게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다고 모함하는가 한편 왕이 잠든 틈을 타 도당을 잠입시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혜종이 한 주먹으로 제압하고 끌어내게 했으니 혜종도 대담하면서도 어느 정도 무예가 있던 인물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한 혜종도 언제나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하루는 고려 초기의 문신 최지몽이 간언하여 처소를 옮겨 참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왕규는 분노하고 최지몽을 꾸짖었으나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리던 중 재위 2년 만에 혜종은 죽게 되었습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정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정종은 왕규가 왕위를 노린다고 모함한 왕요와 왕소이고 그 중에 형인 왕요가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따라서 왕규가 한 모함이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혜종에게는 태자가 있었음에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요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정종은 왕규가 반역을 꿈꾼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서경대광 왕식렴으로 하여금 왕규의 세력을 처단하였고 왕규는 갑곶으로 추방당했다가 그 곳에서 참수당했습니다. 이에 왕식렴은 정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공신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왕건이 죽은 이후 고려의 왕권은 불안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후에 왕식렴이 정종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으며 왕식렴이 서경을 근거지로 두었던 만큼 정종은 즉위부터 서경천도를 계획하게 됩니다. 

“그대는 나라의 주석이다. 흉악한 무리인 간신들이 변란을 꾀했으나 불에 들어간 옥이 더욱 냉기를 발하고 눈 맞은 소나무가 더 푸른 빛을 발하듯, 그대가 악당들을 처단해 나라를 바로 세웠다. 나라가 혼란할 때 어진 신하를 알게 되고 강풍이 불 때에야 질긴 풀을 안다는 옛말이 바로 그대로 두고 한 말이로다. 만석의 널따란 토지와 9주의 수령 자리를 모두 그대에게 준다해도 공적을 다 갚을 수 없으리.”
정종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끔 도움을 준 왕식렴을 공신으로 책봉하며 한 말입니다. 이 말에는 정종이 얼마나 왕의 자리를 염원했는지 알 수 있으며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태조 왕건이 죽은 이후에 조정의 상황이 살벌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신을 책봉하면서 공신을 찬양하는 것이 마치 도가 지나치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정종은 서경세력 왕식렴의 힘을 얻기 위해 서경으로 천도해고자 했을 때 민심을 어땠을까요. 개경의 귀족의 반발은 당연했었고 민심 역시 무시한 계획이었습니다. 
“정종께서는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하셨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를 접견하셨고, 또 어떤 때는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모든 정사를 듣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즉위한 초기에 사람들이 모두 서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참을 그릇되게 믿게 되자 도읍을 옮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천성이 굳세시어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고, 급박하게 백성들을 징발하여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니, 비록 임금의 생각이 옳다고 해도 사람들의 마음은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원망과 비방이 이로 인해 일어났고 재난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재빨리 응하여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지도 못하고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떠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최승로의 평가 
정종은 열정적으로 정사를 돌보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사찰에 쌀 7만석을 시주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종의 서경천도계획 자체가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개경을 도읍으로 한 고려 건국이 채 50년도 안된 시점에 서경천도계획은 아무래도 납득될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개경세력을 숙청한 왕식렴에 대한 공신책봉은 잔존해 있던 해당지역 세력의 반발을 불러오는 것이었습니다. 훈요 10조에서도 서경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서경천도를 하려고 했지만 훈요십조에서 서경을 중시하라는 것은 이 곳이 옛 고구려의 도읍지였기 때문이고 이에 따라 북지정책의 전진기지로 삼으라는 의미였지, 때를 보아 도읍을 이곳으로 옮기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거란이 고려로 쳐들어올 수 있다는 첩보가 입수됨에 따라 광군을 조직하게 됩니다. 전국에 걸쳐 조직되는 30만 병력의 일종의 예비군이었는데 여기에는 호족이 지휘하는 군사력도 포함되어 있어 호족의 반발을 샀습니다. 정종 입장에서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처였으나 이면에는 호족을 광군지휘관으로 삼아 왕의 통제력 밑에 두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서경천도를 위해 서경지역에 궁궐을 짓게 하니 이를 통해 징발된 백성들의 원성도 대단했습니다. 따라서 민심을 외면한 천도를 꿈꾸는 왕에게 호족이 자신들의 군사를 쉽게 내어줄리 없었습니다. 정종은 광군을 조직하기에 앞서 반대세력을 끌어안고 설득했어야 했는데 서경세력만 감싸고 돈 나머지 자신으로부터 등을 돌린 개경세력과 여타 세력을 다독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후 949년(정종 4) 1월, 서경의 왕식렴이 갑자기 죽었고 그로부터 3개월 뒤인 949년 4월, 정종 또한 26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습니다. 정종이 토산물을 받으려 하는데 벼락이 떨어져 토산물을 바치던 사람이 죽게 되고 그를 본 정종이 병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에 사람들이 기뻐하였다고 하니 이 이야기가 정종의 귀에 들어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곧이곧대로 믿기 힘듭니다. 아마 그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죽음을 맞은 건 아닐까요. 

정종이 안장된 안릉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은 후백제 왕 견훤의 외손녀 문성왕후의 아들입니다. 만약 경춘원군이 왕위에 올랐다면 정종의 사망 당시 나이가 27세였으므로 경춘원군은 기껏해야 10세 이전의 나이였을 것입니다. 경춘원군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면 이후에 견훤의 자손들이 고려왕실의 왕위를 이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섭정도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혜종과 정종의 사례에 따라 석연치 않게 폐위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고려 초기의 혼란했던 왕실의 모습은 더 이어졌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동생인 왕소를 후계자를 임명하고 사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종의 후견인인 왕식렴이 서경세력인 반면 후에 광종이 되는 왕소와 친한 세력은 청주 황보씨 계열이니 이들간의 대립으로 인해 정종이 희생된 건 아니냐는 의견도 제기되었습니다. 정종이 자신의 세력뿐만 아니라 다른 세력도 포용했더라면 그의 재위기간은 더 길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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