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치체제를 확립한 성종
2022. 8. 16. 20:1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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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청했다. 학교 재정을 확충해 선비를 양성하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등용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함께 일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그런 어진 군주이다.’
고려 후기의 이제현의 평가에 따르면 성종은 어진 군주로 조선의 성종 못지않게 왕으로서 훌륭한 수완을 발휘한 리더로 생각됩니다. 고려에서는 34명의 존재하는데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물론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다르지만 그가 좋은 정치를 펼쳤다는 데에 대부분의 후세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종의 치세에는 선대 왕인 광종의 숙청이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가 일으킨 피바람으로 인해 성종 대에는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이 성종 치세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종 바로 이전의 왕은 광종이 아니라 경종입니다. 그럼 광종의 숙청 작업에 따른 덕은 경종은 봤을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경종의 외가는 황주 호족출신이었는데 그는 성장하면서 부왕의 의심에 목숨을 잃은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2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광종의 친모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충주 호족, 경종의 모친인 대목왕후 황보씨의 황주 호족, 태조의 제 6비인 정덕왕후 유씨의 정주 호족들이 의기투합하여 경종에게 대사면령을 건의하였습니다. 이로써 광종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세력이 다시 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면 복권되어 정치계에 돌아온 이들은 소위 복수법을 이용하여 1년 동안 자신들을 참소했던 사람들을 찾아내 복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왕선이란 자가 태조의 아들인 효성태자와 원녕태자를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자 경종은 복수법을 금하고 왕선을 귀양보냈습니다.
정신을 차린 경종은 좌우 집정제를 두어 권력 집중을 방지하였으며 전시과를 마련하여 고려 토지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제도는 관품과 인품에 따라 토지를 나눠주는 제도였는데 관품만 기준으로 할 경우 고위관료를 차지하고 있던 호족들의 세력을 크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인품을 포함하여 신진세력들에게 힘을 실어주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는 이들에게는 토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세금을 거둘 권리인 수조권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종의 이러한 정치에 호족들이 반발을 일으키니 경종은 최지몽을 옆에 두고 자문을 얻으려 했습니다. 최지몽은 점성술에 능한 바 이전에도 왕규를 제거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는데요. 그의 예지로 유력 호족인 왕승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하자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분 것입니다. 광종의 숙청작업을 오랫동안 보고 자라온 경종은 정치에 환멸을 느꼈고 이후 오락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981년, 2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경종은 나름 고려를 정비하기 위해 노력하려 했으나 선대 왕인 광종이 벌여놓은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복수법을 수용한 것은 이후의 그의 정치생명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고 따라서 그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토지제도 전시과도 계속 이어나가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들 송이 1살이었기 때문에 왕위를 잇기에는 너무 어렸으므로 그는 사촌 동생 개령군 치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성종은 태조의 제 4비 신정왕후 황보씨의 소생 대종 욱과 태조의 제 6비 정덕왕후 유씨의 소생인 선의왕후 사이에서 난 둘째 아들로 그가 왕이 되었을 때 느낀 점은 고려를 통치할만한 정치이념이 부재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고려가 불교국가이기는 하나 이를 정치이념으로 활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 5품 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체제 개혁을 위한 봉사를 올리라고 명하였고 이 때 채택한 것이 그 유명한 최승로의 시무 28조입니다.
그리고 983년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내사성(內史省)과 문하성, 상서성을 설치하였습니다. 이 중 내사성은 문종 대에 이르러 중서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려의 중앙관제인 2성 6부입니다. 고려의 중앙관제가 2성 6부인지 3성 6부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으나 무신정권기에 정방(政房)이라는 기구에 밀려 3성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시기를 빼곤 고려말까지 중앙정치조직으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충렬왕 원년인 1274년에는 기존의 3성을 합하여 첨의부로 개편되기까지 존속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칠시, 사헌부, 중추원 등을 설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통제를 위해 12목을 설치한 것도 성종 대의 일입니다. 12목은 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해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황주를 일컫는 말로 이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습니다. 이는 왕이 직접 통제하겠다는 의지로 주로 해로와 수로가 가까운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었습니다. 따라서 전국각지에 살던 고려의 백성들은 12목에 세금인 쌀을 바쳤고 이 세금을 수로와 해로를 통해 개경으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목(牧)이란 말을 사용하였으니 길의 중요한 통로라는 의미은 ‘목이 좋다’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종은 12목을 설치하고 난 후 전국을 다시 나누니 그게 바로 5도 양계, 그리고 경기입니다. 이 때 나온 경기는 바로 왕이 거주하는 도읍(개경)과 그 주변 지역으로 왕실을 보호하고 관청의 정비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은 특별구역이었습니다.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왕이 사는 곳 주변을 경현(京縣)이라 하고 그와 가까운 고을을 기현(畿縣)이라 하였으니 여기서 경기라는 이름이 나타났고 고려 성종은 도읍 개성을 개성부로 고치면서 그 아래에 경현과 기현을 둔 것입니다. 또한 성종 대에 2군 6위라는 군사제도를 정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고려의 정치 기틀을 닦아가던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적인 정치를 펼쳤는데 그런 그의 정치인생에 타격을 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두 여동생 헌애왕후와 헌정왕후가 성스캔들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성종 이전의 경종의 후비였는데 둘다 과부이기도 했고 조선시대보다 고려시대에는 연애가 자유로웠으니 그리 흠될 것은 아니었으나 유교를 정치이념을 삼은 성종에게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 둘과 관련된 김치양와 대종의 동생인 욱을 귀양보냈습니다.
한편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실시한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반대로 되돌리는 노비환천법은 성종 1년에 최승로의 건의로 실시되었습니다. 노비에서 양인으로 해방된 자를 다시 천민으로 돌릴 것을 규정한 법이었는데 옛 주인에게 버릇없이 군 방량노비 외에 공로가 있더라도 옛 주인을 가벼이 여기는 자나 옛 주인의 친족과 다투는 자가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뚜렷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옛 주인 마음대로 대부분 환천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최승로가 성종이 정치할 때 보좌관 역할을 한 셈입니다. 성종 시기에 외부적으로도 위기가 있었으니 바로 거란의 침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서희가 담판자로 나서 전쟁을 마무리하는 수완을 발휘합니다. 최승로가 중국의 문물도입을 주장하는 화풍파라면 서희는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는 국풍파였습니다. 성종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것을 받아들이자는 화풍성향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다른 정치성향집단을 무시하지 않고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최승로의 건의를 따르는 데에도 그만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성종은 광종의 정책을 계승하여 중국의 문물도입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최승로는 광종에 대해 비판적인 관료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성종이 그를 포용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신하들의 마음을 귀담아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성종이 중국의 화폐 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국풍파 관료들이 고려의 현실에 맞지 않다며 간언하자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국풍파의 눈치를 보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르나 고려의 여러 제도를 정비한 그의 정치적 능력으로 볼 때 일을 추진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군주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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