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은 왜 만부교 사건을 일으켰나.

2022. 8. 14. 20:1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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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년 거란은 고려에 사신과 함께 낙타 50필을 보내왔습니다. 이건 친선의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조정에서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여겼으며 그 사신을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습니다. 이러면서 고려와 거란의 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제대로 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그 중에 거란을 지목하여 금수의 나라라 하였으며 그 언어와 제도를 본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군주가 어떤 특정 국가를 싫어할 수는 있으나 왕건이 남긴 훈요 십조는 후대 임금에게 지키도록 했으면 하는 약조로 10가지 약속을 남겼는데 그 10가지 중에 하나를 거란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남긴 것은 참으로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태조 왕건이 명으로 거란이 보낸 낙타를 굶어죽게 한 일, 이른 바 만부교 사건은 아예 이해못할 바는 아닙니다. 고려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로 거란이 1차 침입 때에는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역시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가 거란이었으니 태조 왕건의 분노는 당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교라는 것은 현실적인 부분이고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은 태조왕건의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거란이 싫었으며 낙타만 받고 말던가 아니면 그냥 되돌려 보내면 될 일이지 굳이 그런 끔찍하게 일을 벌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태조 왕건이 고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이러한 일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옛 영토를 수복하는 것과 거란쪽에서 보낸 낙타를 굶겨죽게 하며 대동한 사신을 유배보낸 것은 깊은 연관점은 찾기 힘듭니다. 달리 말하면 당시 거란이 대대적인 침공을 하기 전이었는데 만부교 사건은 거란의 침략을 야기시킬 수 있는 사건이었고 실제로 거란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커다란 침략이 3번에 걸쳐 이루어졌고 아마 작은 침입까지 더한다면 4번 이상의 침입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거란이 고려가 자신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점과 송나라와는 친하게 지낸다는 점, 그리고 강동6주의 반환을 이유로 침략하였습니다. 그리고 만부교 사건 역시 거란의 침략을 야기시킬 수 있는 사건이었고 실제로 이 사건이 거란의 침략의 원인이 되었을 거란 의견도 있습니다. 다만 거란이 직접적으로 만부교 사건을 지적하며 이를 가지고 고려를 침략했다고 밝히지는 않습니다. 
이와 더불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926년에 발해가 멸망하면서 발해 태자 대광현이 발해 유민 10만 여명을 데리고 고려로 넘어온 것입니다. 발해 유민들의 합류는 고려입장에서는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입장에서는 거란을 적대할 명분이 생겼습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북진정책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발해의 유민을 활용하고자 하는 태조 왕건의 계획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존재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거란 입장에서도 분명 고려와 마찰을 일으켜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낙타 50필을 보내와 친선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태조왕건은 만부교 사건을 일으킵니다. 아마도 태조왕건은 이를 통해 발해태자 대광현과 유민들에게 고려는 거란을 증오하는 나라이니 발해 유민도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고 고구려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노력하자라고 선포하는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려사 원문에는 낙타가 탁타로 표기되었다.

한편 중국 송나라의 서긍은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다녀갔는데 그러면서 고려의 실상을 알려주는 『고려도경』이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여기서는 고려왕실에 대하여 이러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고려)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구려의 대족이다. 고씨의 정치가 쇠퇴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왕으로 세웠다. 왕건은 후당 장흥 3년(932)에 스스로 권지국사라 칭하며 후당 명종에게 봉작을 청하자 명종은 고려의 왕으로 봉했다.”
거란이 1차 침입 때는 서희가 외교담판을 통해 고려가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임을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거란의 1차 침입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려가 고구려와의 연계성에서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가 차지했던 땅은 아주 예전에는 고구려가 차지하기도 했지만 한때는 백제땅이기도 했고 이후 신라가 통일하고 나서는 줄곧 신라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라왕실에 반대해서 일어났고 해당 지역의 호족들에게 지지를 받기 위해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연결고리는 서희의 외교담판에서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려도경에서의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왕건의 조상이 고구려인이므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서긍의 기록은 고려를 와서 고려사람들에게 물어서 기록을 했을 것인즉, 고려초기의 고려백성들도 고려를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보고 있으며 서긍 역시 고려의 전 역사를 고구려와 발해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럼 고려왕실은 고구려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고려사』 고려세계에서는 고려국조신화라는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건국신화입니다. 태조왕건의 6대에 걸친 선조들의 내력을 다룬 것으로 왕건의 6대조 호경, 5대조 강충, 4대조 보육, 3대조 진의, 할아버지 작제건, 아버지 용건(龍建)을 각기 주인공으로 삼은 여섯 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단군의 고조선건국설화를 듣고 나면 우리가 하늘의 자손이구나 느낄 수 있잖아요.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은 아니지만 선조의 행적을 신화적으로 미화시켰으며 고려왕실 또한 신성한 혈통이고 따라서 이를 이어받은 왕건이 고려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를 내세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가 조선에도 이어져 용비어천가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5대조 강충을 설명하며 후손 중에 삼한을 통합할 인물이 나오리라는 말에 따라 송악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왕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기보다는 고려의 건국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기 위한 신화적인 창작과 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대조 호경은 활을 잘 쏘았고 스스로 성골장군이라 칭했습니다. 활을 잘 쏘았다고 하는 것은 마치 고구려를 세운 주몽을 연상시키며 성골은 신라의 골품제도의 최상위계층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렇듯 고려의 국조신화에서는 고려가 고구려, 신라와 연관을 갖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조신화인만큼 이해못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6대조 호경이 본래 과부였던 산신과 결혼하여 신정을 펼쳤다는 이야기나 2대조 작제건 역시 활을 잘 쏘았고 이를 능력으로 서해용왕의 청을 들어 여우를 활로서 퇴치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신화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 2대조 작제건의 어머니는 당나라의 숙종이라는 귀인과 동침하여 작제건을 낳았다고 하니 고려왕실이 실제로 중국과 연관이 있다기보다는 이렇게 이야기를 꾸며 고려왕실의 존엄성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로 보입니다. 
여기서 6대조 호경이란 인물은 백두산으로부터 유람하여 부소산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다고 하는데 백두산은 우리가 예부터 민족의 영산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호경은 왕건의 6대조이므로 호경이 정말 백두산 근처에서 장가를 들었다면 그는 고구려 사람 혹은 발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고려 왕건은 고려국조신화를 통해 고구려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만부교사건은 이러한 배경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요. 자신의 조상이 살던 나라를 멸망시킨 거란을 왕건 입장에서는 좋게 바라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국조신화가 많은 고려백성들에게 알려졌을까 싶기도 하지만 알려졌어도 당시의 사람들이 이를 믿고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의 고구려의 후예이고 고려 역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마 만부교 사건은 이러한 배경아래 터진 일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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