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는 조작되었을까.

2022. 8. 11. 20:2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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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십조」라는 것은 943년 고려 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10가지의 유훈으로 후대 왕들이 이를 토대로 지킬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고려왕조에서는 이를 토대로 왕조 내내 지켜졌을 것이라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 「훈요십조」 가운데 지금의 시각은 물론 당시의 생각으로도 이해못할 조항이 있습니다.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의 산과 땅은 모두 배역의 형세이며, 인심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국가에 변란이 일어나거나, 혹은 고려에 통합된 원망을 품고 국왕이 가는 길을 막아 난을 일으킬 것이다. 관청에 속한 노비와 진과 역의 잡척들은 양인이라도 관료가 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마땅하지 않다.”
이것은 「훈요십조」 8조의 내용입니다. 위 내용은 특정 지역의 사람들을 함부로 등용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지역차별을 유발할 수 있는 내용으로 특히 혼인정책과 사성정책을 포함한 여러 호족포섭정책으로 삼한을 하나의 국가 고려로 통합시키려 했던 태조 왕건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항을 태조 왕건이 죽기 한 달 전에 남겼습니다. 그럼 훈요십조에서 말하는 공주강 이남지역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사실 이 지역에 대해 고려시대에서는 구체적인 지역을 말하고 있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 이 지역을 호남지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려 때 이미 차령 이남과 공주강 밖은 배역의 형세라 하였다. …호남의 강은 형세가 산발과 같아 사람들이 광교하니 사대부가 의탁할 곳이 못된다.”『성호사설』
여기에 더해 성호 이익은 태조가 남긴 훈요십조 중 제 8항을 지적하여 이런 글도 남겼습니다. 
“고려 태조(왕건)가 남긴 <훈요십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으나 지금 우리 조선왕조의 기반은 전주인데, 도선의 말이 과연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한갓 사람을 등용하여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할 줄만 알았지,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남모르는 사이에 옮겨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익은 훈요 십조 제 8항에 대해 잘못을 따지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왕조가 전주에서 왔다며 말을 하며 호남지역에서 인물이 나와 나라를 건국하게 한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고 비꼬았습니다. 그리고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왕건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글을 남겼습니다. 
“신라 말 후백제 견훤이 전라도를 차지하고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서 태조는 자주 위태한 경우를 당했다. 태조는 견훤을 평정한 뒤에 ”백제 사람을 미워하여 차령 이남의 물길인 금강은 모두 거꾸로 흐르니 차령 이남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풍수지리설에 입각하면 금강의 물길이 거꾸로 흐르는 배류수이므로 배역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좋은 땅은 어떤 땅일까. 산을 바라보았을 때 감싸 안는 형국을 띠어야 하고 물길도 바라보는 쪽으로 감싸안는 것을 순행이라 하여 이것을 좋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반대로 물길은 바라보는 쪽을 등지고 흐르거나 산줄기나 물줄기가 바라보는 쪽을 형해 달려오는 모양새를 하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배역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개경을 등지고 돌아가는 물줄기는 바라보는 사람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형국, 즉 반궁수의 지세이니 이를 좋지 않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고려사』에서는 섬진강, 영산강, 낙동강을 3대 배류수로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훈요십조」에서는 금강을 유독 배류수로 지목하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만약에 차령 이남의 지역의 문제가 되면 비보풍수로 해결하면 될 것입니다. 비보풍수란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어떤 지역의 풍수적 결함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비보풍수는 신라 말기의 도선국사의 비보사탑설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으니 이는 신라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국토가 병들었기 때문으로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방 각지의 적절한 지점에 사탑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훈요 십조 8항

그럼 신라말과 고려초기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왕건의 고려를 건국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여겨지는 도선국사는 어디 사람일까요. 그는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 왕조 내내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 도선이 호남출신인 것입니다. 같은 영암출신의 인물로 최지몽이 있으니 그는 태조 왕건의 고려 건국을 도왔으며 최지몽은 또 하늘의 별을 보고 “곧 변란이 있을 것이니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조언해 왕족 왕규(王規)가 일으킨 2대 임금 혜종 시해 음모를 막아내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태조 왕건의 제 2비인 장화왕후 오씨는 서남해 거점지역인 나주출신 해상 세력 다련군의 딸, 제 2비 소생은 태조의 뒤를 이어 혜종이 되었으니 혜종의 외가도 호남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남 장흥 출신인 정안 임씨 가문이 인종과 의종의 외척이었으며 유방헌, 김심언, 전공지 등 전라도 출신 인물이 고려정치계에 진출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은 전라도 곡성출신이며 이 「훈요십조」를 받아적은 박술희는 충청남도 당진출신입니다.  「훈요십조」의 제 8항은 태조 왕건도 잘 지키지 못했고 그 후대왕들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태조께서 수군으로 나주를 점령한 뒤, 그 바다와 섬의 이익을 모두 얻었다. 그 재물의 힘으로 삼한을 통일할 수 있었다.” 『고려사』
기록에서는 오히려 호남지역의 힘으로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면으로 볼 때 태조 왕건이 호남지역을 차별하라고 말을 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훈요십조」에서 지켜지지 않은 것은 제 8조만이 아닙니다. 사찰을 함부로 짓지 말라는 제 2조도, 장자에게 왕위를 상속하라는 제 3조도, 서경에 1년에 100일 이상 머물라는 5조도 팔관회를 지키라는 제 6조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태조의 훈요십조는 병란으로 소실되었는데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그것을 얻어 임금에게 바쳐 세상에 전해졌다.” 『고려사』 
특히 왕가의 중요한 문서가 개인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훈요십조가 조작되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알려진 것은 현종 때의 일입니다. 특히 훈요십조를 발견한 최제안은  신라 경주출신으로 실록 재편찬에 참여했으며 현종을 왕위에 옹립한 최항도 경주출신으로 역시 실록 재편찬에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삼국사기」에서는 현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기록하며 이를 신라의 음덕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훈요 십조 8항 진실은 무엇일까.

하지만 근래에 와서 「훈요십조」는 실제로 존재했으며 제 8조도 다시 검토해봐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학자 이익과 이중환이 제 8조를 전라도로 해석하고 이를 후대사람들이 받아들인 데서 오류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현재에는 제 8조에 말하는 지역은 아마 후삼국시기에 고려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후백제 수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삼한통합에 반감을 가진 사람을 경계하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한편 현종 이후의 문종 대에는 흥왕사를 건립하려 하자 신하 최유선이 신라가 함부로 절을 지어 망했다며 「훈요십조」도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럼 훈요십조는 신하들에게 주요 국정문제에 잣대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훈요십조」는 현종 대에 조작되었을까요. 아니면 왕건이 극비리에 전한 내부문서가 측근에게 전해져 현종 때에 알려진 것일까요. 이래도 저래도 신빙성이 가는 내용이지만 적어도 제 8조에 대해서는 현재 지역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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