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주성을 둘러싼 고려의 외교전쟁

2022. 9. 1. 20:1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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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국보로 지정한 의주성 남문 전경. 고려 영토였던 의주(당시 지명은 보주)는 1014년부터 103년간 거란에 점령됐다. 고려는 보주를 되찾기 위해 거란과 분쟁을 거듭했다.

거란은 고려에 크게 세 번 쳐들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1019년에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군을 무찔러 거란군의 고려 침략의 의지를 상당 부분 꺾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고려가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보주성의 탈환이었습니다. 거란은 1차 침입과 2차 침입을 했고 2차 침입 때는 고려의 왕이 거란에 직접 가서 항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거란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1014년에는 부교를 설치하고 고려의 영내로 들어와 보주성을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고려는 이에 따라 1015년에 탈환을 시도하였고 이후 1019년에는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쳐들어왔으나 오히려 고려에 대패하고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보주성을 돌려받지 못한 것입니다. 거란군이 보주성을 점령한 것은 그들의 1차 침입 때 고려가 강동 6주를 가져갔기 때문에 보상심리로 점령한 것은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만큼 서희의 담판으로 얻어낸 강동 6주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던 1029년 거란의 내부사정이 혼란해졌습니다. 대연림이 흥요국을 세워 요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여진인들도 동참했는데 거란이 소금·술의 전매와 물품 교역에 대해 과다한 세금을 부과해 발해인을 수탈하였고, 흉작으로 인한 생활고에서 반요(反遼) 감정이 첨예화되었으며 발해 멸망 후 끊임없이 지속되던 발해 유민의 반거란·발해부흥운동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1년 뒤 거란에 포위당했고 내부의 분열로 요양성이 함락되고 대연림이 사로잡힘으로써 흥요국의 저항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1031년에는 거란의 성종이 죽었으니 이에 고려는 덕종의 장인이자 문하시랑인 왕가도를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고려는 이를 통해 보주성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였고 더불어 압록강에 가설한 부교를 파괴할 것과 억류 중인 고려 사신 8명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거란이 보주성의 반환을 거부한 것은 앞으로도 고려와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공포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에 대해 강경하게 나서야 한다는 의견과 이에 대해 전쟁으로 피곤해 질 수 있으니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었습니다. 이에 덕종은 강경파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려는 변경지방에 성을 쌓아 튼튼히 방어하고 거란의 사신이 들어오려 하자 이를 막았습니다. 
 한편 1032년에는 거란에서 좌상 도지휘사 대광, 보주 회화군사판관 최운부, 향공진사 이운형 등 많은 거란 관료들이 귀순해오기도 하고 이에 거란은 망명자를 돌려달라 했으나 거절당하자 1033년에 침략하였습니다. 이를 물리친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는 성을 쌓기로 하였는데요. 서쪽 압록강 어귀부터 동쪽 함경남도 도련포까지 천리 길을 돌로 쌓는 거대한 공사로 평장사 유소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북방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탓인지 여러 군데 성이 있었는데 이를 이어나간 것입니다. 이에 거란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덕종은 적의가 없다는 말로 돌려보냈습니다. 한편 이러한 대공사가 진행된다는 소식에 북방의 유목민족은 자신들이 동토에 갇힐까 두려워 속속 고려에 귀화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때 평장사 유소가 거란의 성을 탈취하자는 의견을 내자 덕종은 이를 안건에 붙여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이들의 의견을 대립한 가운데 점을 쳐본 결과 출병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덕종은 강경파와 입장을 같이 했는데 이를 계기로 온건파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고 갑자기 몸이 안좋아진 덕종은 19세의 나이에 1034년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아마 정치적인 힘이 개입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보주성을 둘러싼 대립으로 보고 있습니다. 덕종의 재위 기간 동안 그의 장인인 왕가도가 정국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가 1034년 5월에 죽고 4달 뒤에 덕종이 사망한 것은 덕종이 지지한 강경파의 몰락이 덕종을 죽음으로 내몬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 

거란족

  1035년에 거란이 국교 재개를 위한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당시의 고려 국왕은 덕종의 뒤를 이은 정종이었으며 당시는 강경파가 몰락하고 온건파가 득세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고려 입장에서는 보주성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고려는 보주성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란은 여전히 성종이 뜻을 이유로 보주성 반환을 거절하였습니다. 다만 수차례 협상 끝에 고려는 고려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농사를 짓고 정착하는 것을 요구하였고 거란이 이를 허용하였으니 양측 다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거란은 보주성을 여전히 소유할 수 있었고 고려는 고려인들이 이 지역에서 농사한다는 사실을 들어 이후 보주성 반환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입니다. 
이후 1054년에는 고려는 거란에 서신을 보냈습니다. 고려는 거란 측이 보주성에 군사시설을 설치한 것을 문제삼았으며 이를 철거하고 영토반환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거란은 1055년에는 보주성 근처에 그들의 농사지을 땅을 마련했습니다. 이에 당시 동북아의 국제정세를 잘 파악한 고려는 송나라와 외교를 재개하였습니다. 당시 신법당은 연려제요정책을 외교전략으로 수립하고 있었던 바 고려는 이를 통해 거란을 압박하려 한 것입니다. 이에 다급함을 느낀 거란은 여기에 무역장을 설치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고려 역시 이를 탐탁치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고려는 사신을 보내 무역장을 경영하는 것은 거란 선대 황제인 성종의 뜻에 거스를뿐더러 고려는 요나라의 제후국으로서 역할을 다했으나 그게 헛수고가 되었다며 고려는 이에 대해 좋아하지 않는다고 전했습니다. 고려사신이 전하는 내용은 사실상 거란의 이러한 처신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요나라는 이에 아직 논의중이라고 둘러댄 뒤, 무역장 설치를 철회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아마 당시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친거란 정책을 하는 것으로 거란의 무역장 철회를 유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여진족의 성장이었습니다. 여진족의 성장은 거란에게도 위협이었지만 그것은 고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 양국은 보주성을 포함한 영토 문제를 대립하는 것은 서로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고려와 요나라는 빨리 합의점을 찾고 여진족의 공세에 힘을 합쳐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려입장에서 친송정책에서 친거란정책으로 되돌아 선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걸 빌미로 보주성에 대한 문제도 해결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입장에서는 거란은 여전히 가깝지만 먼 나라였습니다. 금나라가 건국된 뒤, 요나라가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고려에 1115년에 원병을 요청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절한 것입니다. 또한 금나라가 보주성을 공격하자 고려는 이에 이 곳이 고려의 영토임을 금나라에 알리고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금나라는 고려가 이 곳을 직접 점령하라고 하였으니 금나라는 이곳이 고려의 영토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금나라는 이러한 처세를 통해 고려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요나라를 압박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117년에 금나라가 보주성을 함락하려 하자 이에 고려가 군대를 보내 보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100여 년간의 보주성과 관련한 영토분쟁은 고려가 탈환함으로써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국력과 외교력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사실 요나라가 고려를 침공할 시기에는 거란의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성종시기가 포함되었는데 고려는 이 때를 버텨내었습니다. 이 시기의 거란은 송나라의 하북성을 빼앗고 막대한 조공을 받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고려의 국력이 약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마 거란은 진작에 송나라를 흡수했을 것입니다. 당송팔대가인 한사람인 증공은 “오랑캐 중 고려는 힘으로는 절대 누를 수 없고 오직 덕으로 대해야만 감복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고려의 강력한 군사력과 고려와 송, 요의 삼각관계를 이용한 외교력으로 당시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우뚝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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