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고려시대 노비의 삶

2022. 9. 7. 20:2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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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4년 직장(直長) 윤광전이 아들에게 한 명의 비를 지급한 문서.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상속문서다.

우리나라 고대국가시대부터 신분이 있었고 가장 낮은 계급은 바로 노비였습니다. 고조선을 나라를 다스리는 법률로 8조법을 두었는데  그 중에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고 만약 풀려나려면 50만 전을 내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비는 아주 옛날부터 꾸준히 존재했던 신분계층으로 이러한 노비들은 불과 130여년 전만 했도 존재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1894년 갑오경장이 발표되고 나서야 노비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럼 고려시대에는 어떻게 노비가 양인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광종 대에 실시한 노비안검법이란 제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실시하였고 그 중에 노비안검법이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려주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제도이니 노비를 양인으로 해방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배층과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중세사회에서 이러한 제도를 실시한다는 것은 관료들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는 제도였습니. 지배층들은 자신들이 노비들을 소유하는 게 당연하고 지배층에게 딸린 노비들이 어떤 과정에서 노비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노비가 양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중세 사회는 왕과 지배층이 맞물리며 나라를 운영하는 사회였습니다. 따라서 해방된 노비들이 광종의 힘에 보탬이 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했을까. 그것은 바로 노비안검법을 통해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호족들은 고려가 건국되는 데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집단입니다. 따라서 고려가 세워지고 나서 고려의 왕들은 호족들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따라서 고려가 세워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호족들이 광종입장에서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비들은 후삼국시대에 전쟁을 통하여 노비가 된 자들이거나 부모의 신분과 관계없이 강제로 호족들의 노비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호족들의 손과 발이 되어 대신 농사를 짓는 존재였고 때로는 군사역할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통하여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흔들어놓겠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해방된 노비들은 양인이 되는 대신 국가에 의무를 해야 합니다. 세금을 내고 때로는 군사로 징발된 것입니다. 바로 노비안검법을 통하여 양인이 된 자들은 호족들에게는 마이너스 효과를 주고 다시 왕에게는 경제적·군사적으로 플러스효과를 주었고 또한 민심도 광종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있었는데요. 대목왕후는 이를 간곡히 말렸다고 합니다. 『고려사』에는 노비안검법이 실시되자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들이 많았으며, 윗사람을 무시하는 기풍이 성행하여 사람들이 다 원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왕이 간청했으나  광종이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 대목왕후가 이렇게 간청한데에는 대목왕후의 외가가 대표적 호족세력인 황주 황보씨라는 점도 있었을 것이며 광종에게 간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대목왕후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광종 대에 이르러 처음 노비를 조사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게 했습니다. …(중략)…  존귀한 이를 업신여기고 거짓말로 주인을 모함하는 경우도 너무도 많았습니다. 광종께서 스스로 잘못의 근원을 마들었지만 이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중략)… 바라옵건데, 폐하께서 지나 일을 깊이 거울 삼으셔서 천인들이 존귀한 이를 업신여기지 말게 하시고 노비와 주인을 구별함에 있어 공정한 태도를 취하여 주시옵소서” 『고려사』
하지만 성종 대에 이르러 극적인 반전인 일어납니다. 유교정치를 표방하며 대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성종이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노비환천법 즉, 양인이 된 자를 다시 천인으로 돌려놓겠다는 법입니다. 그런데 최승로의 건의를 보면 재밌는 것이 광종 대에 노비안검법이 실시되어 노비가 양인이 되면서 옛 주인을 멸시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려시대에는 지금처럼 모든 개인정보들이 디지털화되어 보관하는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노비의 말에 따라 양인으로 풀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비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들은 대대로 노비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꾸며 노비가 된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광종 입장에서는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진실여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철저한 조사가 수반될 수 없고 호족들의 반발을 살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이 광종이 죽고 나서 부메랑처럼 다시 노비환천법이 되어 양인이 된 자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노비안검법을 통하여 양인이 된 자에게 멸시를 당했다고 하면 이를 인정해주어 다시 노비로 환속시켰고 호족들은 자신의 기반을 되찾은 동시에 권력층끼리 결혼이 이루어지면서 문벌귀족으로 성장했습니다. 게다가 법적으로 더욱 호족들을 보호하는 법안이 마련되었습니다. 노비환천법에 의해 다시 노비가 된 자가 양인이 되기 위해 소송을 걸면 그를 장형에 처하고 그 죄를 문신하여 주인에게 도로 돌려 보낸다는 것입니다. 

여주인과 남종의 성적 열락을 노래한 고려가요 내당

하지만 노비문제에 대해서도 고려왕들은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왕들은 문벌귀족과 무신집권자 이후의 권문세족들을 견제해야 했습니다. 바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공민왕 대에 설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미 그 이전인 1269년(원종 10)에 처음 설치되어 수 차례 폐지와 실시를 반복했습니다. 도감이라는 말 자체가 임시기구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들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여기에는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양민으로 풀어주는 역할도 했으니 광종이 실시했던 노비안검법의 부활시킨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본래는 다른 이름이고 처음의 이 도감의 역할은 권력을 잃은 자들의 토지나 노비들을 조사하여 불법성을 조사하여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새로운 권력자에게 흡수되고 말았으니 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공민왕 대에 전민변정도감으로 개명되어 비로소 실효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이 마련해놓은 제도 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천민신분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최고집권자인 이의민도 본래 천민출신으로 그의 어머니가 노비였던 것입니다. 고려에서도 일천즉천(一賤則賤)이 적용되었으니 이의민도 노비로 살아가야 했지만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무예가 출중하면 이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노비가 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삼년여묘라 하여 효도의 가장 높은 단계라 보았습니다. 주인이 자신의 노비더러 대신 시묘살이를 시키고 그 대가로 관아에 보고하여 노비신분을 벗어나게 해준 것입니다. 하지만 시묘살이를 하더라도 바로 신분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노비 나이가 40세가 넘어서야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지배층이 60세에서 65세 사이에 사망하였으니 노비의 수명은 더 짧았을 것입니다. 삼년여묘를 하고 40세 이후에 노비 신분을 벗어났다하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양인으로 살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반대로 노비가 되려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고려 후기에는 양인에 대한 고려정부와 권문세족의 수탈, 그리고 몽골과 왜구, 홍건적의 침입으로 백성들의 삶이 빈곤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금을 낸다는 것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부 농민들은 스스로 노비가 되려고 했습니다. 대신 솔거노비가 아닌 외거노비가 되고자 했습니다. 외거노비도 노비이기 때문에 군역과 세금을 내지 않았지만 매년 주인에게 받치는 일종의 재물인 ‘신공’만 제대로 내면 재산과 토지도 소유하며 가정도 꾸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고려정부에서도 골치아픈 일이었으니 고려 말에는 외거노비에게도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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