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향부곡소가 있었다.
2022. 9. 6. 20:2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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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향부곡소라는 행정구역이 있었습니다. 아주 예전에서 학교에서 이곳을 천민주거집단 정도로 가르치기도 했으나 지금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향과 부곡에 대해서는 전쟁의 포로를 집단적으로 수용하였거나 아니면 반역을 일으키거나 또는 적에게 항복하면 해당 지역을 향과 부곡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성현, 본래 신라 대병부곡인데,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1018년)에 (상주목)에 내속했다.”『고려사』
이렇게 보면 향과 부곡은 이미 고려 이전의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고려초인 태조 대에 군현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향·부곡도 재편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태조 왕건에게 크게 저항한 집단은 부곡으로 강등당한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에 대해서 천민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에 준하는 사회적 눈총을 받는 곳이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꺼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안좋은 인식이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곡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대신 해당 지역의 향리가 다스렸으며 이 곳 출신의 향리는 아무리 공을 세워도 5품 이상의 고위직 관리에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차별이 존재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예외는 존재하는 법입니다. 고려 원종 대의 박구라는 사람은 무반의 최고직에 올랐는데 몽골의 침입에 맞서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곡인으로는 처음으로 재상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류청신이란 인물은 전남 고흥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대대로 부곡리였습니다. 그는 몽고어를 잘해 여러 차레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왔고 충렬왕의 총애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310년에는 정승에 임명되었고 이후 도첨의찬성사 고흥군으로 강등되었지만 이후 1313년에 다시 정승에 올라 1321년까지 재임하였습니다. 이후 충숙왕이 참소를 받아 원나라로 소환될 적에는 같이 따라갔으며 그 곳에서 권한공, 채홍철 등과 함께 심왕 고와 결탁해 심왕옹립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숙왕이 고려로 돌아가자 처벌이 두려워 고려로 돌아오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고려사』의 간신전에 수록되었습니다. 그리고 류청신은 비록 부곡 사람이었지만 왕의 총애를 받아 높은 벼슬에까지 이른 인물로 그 덕분에 그의 고향인 고이부곡은 고이현으로 높여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려에서는 향부곡과 더불어 소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곳은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생산하는 곳이었습니다. 금, 은, 동, 철 같은 금속이나 종이, 도자기, 먹 등을 만드는 곳으로 당시에는 지금처럼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이러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을 지정해두어 생산하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만드는 물건에 따라 자기소(磁器所)·철소(鐵所)·은소(銀所)·금소(金所)·동소(銅所)·사소(絲所)·지소(紙所)·주소(紬所)·와소(瓦所)·탄소(炭所)·염소(鹽所)·묵소(墨所)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당시 고려 수공업 생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럼 이러한 향, 부곡, 소는 어디에 위치했을까. 혹시 그만큼 차별당했던 만큼 살기 어려운 곳에 자리하지 않았을까요. 이들의 위치를 오늘날 찾아본다면 향과 부곡은 배산임수의 지리적 조건을 띠고 있는 곳이 많았으며 따라서 방어와 피난에 유리하고 땔감과 식수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넓은 농지가 있었기 때문에 농업용수의 조달도 용이한 편이었습니다.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전형적인 농민들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주요 지역이 지금의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인 것을 감안하면 향부곡소가 위치한 곳이 어디인지는 잘 가늠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시 군현의 수는 540여 개인데 향 부곡 소가 760여개 정도였다고 합니다. 향부곡소의 주민 수가 적다하더라도 행정구역 수 자체가 많기 때문에 고려시대에서는 무시 못할 인구 비율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종전의 주장대로 천민이었다면 고려인구의 대부분이 천인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라를 운영하기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들 지역의 주민에 대해 양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향부곡소의 출신으로 출세한 자도 더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이의민과 묘청도 천민출신이었지만 왕을 능가하거나 그를 보좌하는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따라서 향부곡소 출신의 자라 상당히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엄청 낮은 확률이고 당시의 사회 체제는 이들의 출세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일단 향·부곡·소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국학에 입학하거나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합법적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방법이 막힌 셈입니다. 또한 승려도 될 수 없었습니다. 고려시대의 승려는 지금과 사뭇 다른 위치였습니다. 대각국사 의천이 왕자의 신분임에도 승려가 되었지만 사실 고려는 불교국가이고 당시 절은 막대한 경제력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려가 되어 일정 지위에 오르는 것은 당시 엄청난 출세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군현인과 진·역·부곡인이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모두 진·역·부곡에 속하게 한다. 진·역·부곡인과 잡척인이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반씩 나누어 속하게 하고 넘치는 수는 어미를 따른다.”『고려사』
이렇게 군현인과 결혼하더라도 향·부곡·소의 주민에 속하게 되었으며 당시 일반 군현같은 경우는 향, 부곡, 소로 강등당하는 일도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뇌물까지 썼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류청신은 부곡사람이었지만 높은 벼슬에 올랐고 그가 살던 동네는 고이현으로 높이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마 강등되는 경우는 그 반대의 경우였을 것입니다. 바로 국가에 해를 끼치거나 반역한 인물이 나왔을 때입니다.
“귀화부곡소복별감을 두었다. 일찍이 대성이 밀성 사람인 조천이 수령을 죽이고 적에 호응한 죄로 죄를 논하여 귀화부곡으로 강등시켰다. 밀성군사람 박의가 매를 길러 국왕의 총애를 박고 좌우에 뇌물을 바쳐 왕에게 이르기를 ”밀성은 대읍으로 공부가 심히 많은데 부곡으로 강등시켜 진무할 자가 없으니 그 곳의 민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을 막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이런 명령이 있었다.”『고려사』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고을의 지위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을 보면 이곳이 천민주거집단이라는 말도 이해가 갑니다. 따라서 현재에도 향·부곡·소의 주민에 대해 천민으로 보고 연구하는 학자도 있지만 지금은 양인보다는 낮지만 천인보다는 높은 지위의 계급, 이른 바 천역양인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향부곡소는 고려후기에 이르러 점차 없어지게 됩니다. 일단 이곳에 대한 수탈이 너무 심했습니다. 따라서 해당 지역을 떠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권세가에게 붙기도 하고 주인없는 땅을 일구어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향·부곡·소의 붕괴에 기여한 것은 조선건국 초에 있었던 행정구역의 개편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군과 현에 지방관을 파견했습니다. 이전에도 대가족에서 단혼가족으로 나누어지고 천민의 반란, 그리고 대외전쟁 등으로 이들의 사회구조가 흔들렸습니다. 그러니까 고려시대에는 사람이 많이 사는 거촌을 중심으로 향·부곡·소를 두었는데 이들 주민이 유량하면서 기존의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에 거주지가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지역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하여 지방관이 없는 지역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졌고 이들 지역은 15세기 후반에 군과 현으로 승격되거나 흡수되어 완전소멸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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