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예술공예품 나전칠기

2022. 9. 8. 11:0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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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나전칠기 경상

나전칠기는 나무로 만든 상자 장롱 등 목물의 겉에 삼베를 바르고 그 위에 0.3mm~0.5mm의 얇은 전복조개껍데기 혹은 진주껍데기나 야광패껍데기를 붙여 여러 가지 무늬를 만들고 다시 칠을 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 이전에 있었던 칠기라는 것은 중국에서 3천 년부터 만들었고 한국에서는 6세기부터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6세기 초에 축조된 신라의 천마총과 백제의 무령왕릉에서 칠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나전칠기는 이보다 늦은 고려시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나전칠기 공예는 고려자체의 독창적인 예술이자 화려하고 섬세하여 그야말로 동양칠기공예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긍의 『고려도경』에서도 ‘나전의 공교함이 세밀하고 귀하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고려예술품에 대해 극찬하고 있는 것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습니다. 역시 고려에서 만들어진 상감청자나 고려불화에 대한 극찬이 역시 나전칠기에서도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일본의 가와다 사다무라는 사람도 그의 글에서 고려나전칠기의 기법적 특색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럼 나전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전을 풀이하면 소라 라(螺), 비녀 전(鈿) 이라고 하합니다. 이러한 말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공통으로 쓰이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개라는 말을 썼으며 그리하여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자개박이 혹은 자개박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나전칠기를 이용한 가구품이 1980년대에는 대부분의 가정이 있을 정도로 흔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던 고려시대의 모습과는 다른 것입니다. 나전칠공예가 제대로 전승되지 못한 탓에 조악한 작품으로 시중에 나돌았지만 한국 전통공예의 백미로 꼽히는 나전칠공예를 이용한 가구품이 집집마다 있던 것은 참 재미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전칠공예는  당나라를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통설과 다르게 우리나라의 나전칠공예를 6세기 가야에서도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 바로 나전단화금수문경이라고 하는 거울입니다. 그러면서 가야동경의 문양에 비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국 낙양배경의 문양은 당의 중기 혹은 말기에 성행한 풍속화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시기가 가야동경에 비해 뒤떨어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거기에 가야동경은 투조상감방식과 평탈칠공법인데 반해 중국의 것은 조개를 칠로 유착시키는 초기단계이므로 가야나전칠기가 중국보다 앞서있고 독자적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주장을 따른다면 기존에 축적되었던 전통적인 칠기술 위에 당나라의 나전기술이 건너와 결합되어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칠공예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단조한 편으로 여겨졌는데  생칠·흑칠·주칠(朱漆)과 자개를 활용하는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옻칠의 질이 좋고 워낙 자개솜씨가 뛰어나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칠공예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한 우리나라의 자개기술도 역시 중국의 것과 달랐는데 당나라에서 동남아등지에서 자라는 자단을 이용하여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에 바로 나전을 새겼으나 고려에서는 경전, 염주 등을 담는 나무 상자에 굵은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한 다음 그 위에 잘게 썬 나전을 새겨 넣고 다시 옻칠을 입혔습니다. 이후 나전 무늬에 칠해진 칠을 벗겨내고 광내기 과정을 거쳐 제품을 완성하였습니다. 
‘고려에서 그릇에 옻칠하는 기술은 정교하지 못하지만 나전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도경』
서긍의 기록에서는 고려의 옻칠기술과 나전기술을 분리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고려는 왕실 기물을 관리하는 관청중상서에서 나전창과 칠장을 분리해 관리했는데 그의 표현에 따르면 칠공예보단 나전기술에 후한 점수를 준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옻칠 공예품들을 보면 화려하므로 서긍의 지적과는 달리 고려의 옻칠기술 역시 상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옻칠을 하면 방수효과가 뛰어나고 쉽게 부패하거나 썩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릇의 예쁜 모양을 오래 가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기술은 고려는 발전시켰는데 이에 원나라는 고려에 장인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인 옻을 정제해 칠한 그릇을 칠기라 했으니 옻나무가 많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인지 이러한 옻나무는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했습니다. 그리고 신라에 이미 칠기를 제작하는 칠전(漆田)이 있었고 옻나무의 식재를 고려와 조선시대에서도 관리했다고 하니 고려시대 때 나전칠기가 예술적으로 크게 융성한 것은 남북국 시기의 신라에서도 어느 정도 숙련된 나전칠기 장인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며 이 기술의 전승되어 고려시대 때 그 꽃을 틔운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나전기술은 다양한 용도에 활용되었으니 1080년 문종 대에는 고려는 송나라에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 한 대를 조공했으며 1245년 최이는 잔치를 열며 커다란 그릇을 나전으로 장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종 때에는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많은 나전그릇을 선물로 주었는데 이후 고려에 거란사신이 와서 나전그릇을 요구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서긍의 기록뿐만 아니라 고려의 나전기술을 주변국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1272년에는 원나라의 황후가 대장경을 담을 나전으로 장식된 상자를 요구하였으니 고려는 이에 따라 전함조성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나서는 곧 폐쇄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청자하면 상감기법이 떠오르는데 당시 고려의 나전칠기의 최고의 공예품으로 올려놓았던 고려 장인들의 비밀은 무엇이 있었을까. 일단 고려시대의 나전칠기는 흑칠 위에 나전·대모·은사·동사를 감입하여 무늬를 만드는 특징이 있었으며 자개는 전복껍데기를 종잇장같이 얇게 갈아서 사용했는데 당나라처럼 야광패나 소라 등도 두껍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박패법은 중국의 당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 나전칠기의 중요한 기법 중 하나는 바로 복채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대모를 얇게 갈아 그 뒷면에 색을 칠하거나 금박을 입혀 표면에 비쳐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 나전칠기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금속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당초무늬의 덩굴줄기나 무늬와 무늬 사이 경계선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했으며 주로 은선, 동선, 주석선이 쓰였는데 이러한 것도 중국 것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일본에서 환수된 고려시대의 나전국화넝쿨무늬합으로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공예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2020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나전칠기함이 환수되었습니다. 바다거북의 등껍질과 전복껄질을 잘게 갈아 크기가 2~3mm밖에 안되는 작은 장식을 붙여 만든 나전칠기함으로 국화와 넝쿨무늬가 빼어난 모양새를 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나전칠기의 예술을 알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전세계 22점 밖에 남아있지 않은 고려시대 나전칠기 중 하나가 국내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려시대의 나전칠기가 세계 곳곳에 흩어졌으며 그 수도 22점으로 매우 적은 것일까. 나전칠기에 쓰이는 재료 중에 대모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 자체가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조선시대의 나전에서는 많이 쓰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재료들도 재료 수급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따라서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재료를 이용한 나전칠기는 제작이 되더라도 극소수를 위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들어지고 나서도 깨지거나 부서지기 쉽고 온도나 습도 등에 약해 보존이 어려웠습니다. 여기에 워낙 귀한 고려의 나전칠기이다보니 외국의 왕실로 보내졌으며 따라서 이번에 일본에서 돌아온 1점까지 국내에는 총 3점의 고려시대의 나전칠기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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