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내시와 환관

2022. 9. 9. 11:0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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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김돈중

사극을 보면 환관이 종종 등장합니다. 구부정한 자세에 수염이 없고 가냘픈 목소리로 흡사 간신같은 느낌은 주는 환관을 일컫어 우리는 내시라 하여 거세된 남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왕의 곁에 있으면서 집권자의 향락을 조장하거나 권력싸움에 끼어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환관은 우리나라에서는 내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흥덕왕 때에 그 모습을 볼 수 있고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며 존재했던 것이 바로 환관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연산군에게는 김자원이라는 환관이 있었고 고려 의종 때에는 정함, 백선연이라는 환관이 왕의 권세를 믿고 정치판에서 난리를 부렸습니다. 공민왕을 살해한 사람도 환관 김만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려시대에도 환관은 존재했습니다. 다만 고려시대의 환관은 조선시대의 환관과는 그 결이 달랐습니다. 고려에 내시와 환관이 따로 존재했으며 고려의 내시는 거세된 남자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권문세가의 아들이나 과거의 급제자들로 성적으로 정상적인 남자였고 이들은 왕을 경호할만한 근거리에 있으면서 비서역할을 수행했고 과거급제자이거나 명문가의 자식이므로 학식도 뛰어났습니다. 따라서 고려의 내시는 자기가 죽었을 경우 내시라 새겼으므로 그 직위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환관과 내시를 동일시하거나 헷갈려하고 있습니다. 고려초기의 이 둘의 시작은 판이하게 달랐으니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명문가의 자제들로 구성된 엘리트집단이었고 환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거세된 남성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립대학을 처음 설립한 최충의 손자 최사추, 고려중기 최고의 지식인이자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그리고 고려에 최초로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 등이 내시로 선발된 것은 그들이 엘리트집안이자 명문가의 자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고려 중기 이후에 이 환관이 내시가 하던 역할까지 맡게 되면서 후대 사람들에 혼란을 가져온 것입니다. 따라서 고려초기 때까지만 해도 환관과 내시는 엄연히 달랐습니다.  
내시가 되면 보통 임기를 9년을 상한으로 두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정항이란 사람도 내시부에 속했는데 그가 죽었을 대 인종은 “30년 근시요, 11년 승제를 지낸 사람이 이렇게 가난하게 지냈으니 진실로 가상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정항은 청렴하게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왕의 말처럼 내시는 규정대로 9년만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한편 내시직은 거친 바 있는 한안인이라는 사람은 과거급제 이후 당시 최고 세력가인 인종 때 이자겸 일파와 대립을 이룰 정도로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탐탁치않게 여긴 이자겸이 왕의 외할아버지라는 권위를 악용하여 그에게 역모죄를 씌우고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 한안인과 관련하여 죽은 20여 명의 사람들도 내시직에 있던 자들로 당시 내시들의 위치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청백리로서 많이 알려진 내시로 유응규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했으나 풍채가 아름답고 문장능력이 뛰어나 내시로 들어갔고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참관이 되고 현재 서울 지역인 남경의 수령으로 부임했습니다. 이 때에는 투명한 행정으로 백성들에게 어떠한 뇌물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응규의 부인이 아이가 병이 들었는데 나물국만 마시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관아의 향리가 몰래 꿩 한 마리를 바쳤습니다. 이 때 자신의 남편도 안받는 뇌물을 받을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고려시대의 내시는 왕 측근의 최고 엘리트로서 성 불구자가 아니었다. 여진 정벌로 이름을 떨친 윤관의 아들이요, 문장가 윤언이의 동생인 윤언민도 내시였다. 사진은 윤언민의 묘지명.

고려시대의 내시는 비교적 엄격한 기준을 두고 선발하였는데 문종 때에는 재능과 공로가 있는 자 중에서 용모가 수려한 사람을 20명을 선발하여 내시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서리직에 있으면서 실무능력을 인정받아 내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 밖에도 점을 잘 치거나 격구같은 스포츠에 재능이 있으면 선발될 수 있고 뇌물을 쓰고서 내시가 되었으니 고려시대의 내시는 승려처럼 출세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면 뇌물을 써서 내시가 되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까닭은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여 총애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되기도 했는데 이를 받아내기 위해 빚쟁이들이 궁궐까지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시직은 애초에 문신으로 등용이 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인정변 이후에 무신에게도 내시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경인년 이래 무관은 모두 문관을 겸하였으나 내시와 다방만은 겸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겸속을 허락하십시오"라기에 이런 명이 있었다. 무관이 (내시를) 겸속함은 이로부터 시작됐다'
 '장군 차약송 등 43인을 내시원(內侍院)과 다방(茶房)에 겸하여 속하게 했다'고 『고려사절요』 명종 16년(1186)
 따라서 최충헌의 사위를 비롯, 최충헌의 주변인들 중에 내시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무신집권기에는 내시에 임명된 133명 중  명종 대에 11명, 신종 대에 1명, 고종 대 5명, 원종 대 2명 등 모두 19명이 무반 출신이었습니다. 다만 경대승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무반으로서 내시에 등용된 자가 없었습니다. 경대승은 옛 뜻을 되살리고 무신정변이나 무신의 집권에는 반대했던 인물로 알려졌기에 기존의 법을 무시하는 내시선발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무신집정자들은 내시를 임명하였습니다.  애초에 명문가의 엘리트 중에서 뽑는 것이 내시였으나 이후에는 점점 선발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그리고 원간섭기에는 그 선발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내시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며 몽고어를 잘 하는 사람들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역을 기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내시직을 희망하여 그 도피처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폭이 넓어진 것에 대한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내시라는 직책이 워낙 매력적이었던 탓에 시간이 지나면서 내시의 역할이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환관은 어땠을까요. 고려초기의 환관은 그 정원이 10여명으로 적었으며 왕의 총애를 받더라도 그 직위가 칠품까지 오르는데 그쳤습니다. 고려 초기의 환관은 궁중을 청소하거나 내명부의 궁녀들을 관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전쟁에서 포로가 된 자들을 거세시켜  환관으로 삼거나 형벌로 궁형을 받은 자들이 환관이 되었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궁형이란 형벌이 없었으니 선천적으로 그리 태어나거나 사고로 잃게 된 자들을 환관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환관이 된 자들 중에는 원나라에 갔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그 권력으로 고려를 흔든 임백안, 독고사, 방신우, 고용보같은 인물이 있었는데요. 특히 고용보는 기씨녀를 황제의 다과를 시중들도록 하는 시녀로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며  또 다른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 등의 협력으로 왕실권력싸움에서 승리하여 기씨녀를 순제의 제2황후가 되게 하니 그가 바로 기황후입니다.
고려의 환관은 내시와 함께 왕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근시(近侍)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관 역시 강한 권한을 누리며 정치에 참견하곤 하였습니다. 특히 고려 말기에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습니다. 왕의 측근인 내시나 환관의 권세가 강하다는 것은 그에 비에 왕의 권력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은 부정부패를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환관으로서 정치에 나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인물로 앞에서도 언급한 의종 때의 인물 정함이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 개에게 물려 불구가 되었는데요. 의종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는 동안 그가 마음대로 정세를 폈는데 그 역시 왕처럼 호화로운 삶을 누리면서 문신들과 결탁하여 매관매직을 일삼고 아부하는 자들을 관리로 벼슬직에 올렸습니다. 그 때문에  “나라의 권세가 모두 고자(정함)에게 있구나!”라는 말까지 개경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 때문에 무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알고 보면 환관은 곧 내시라는 생각하시겠지만 고려시대 때에는 둘은 엄연히 달랐습니다. 하지만 당시 정치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였다는 점은 비슷한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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