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높았던 고려 여성의 지위
2022. 9. 10. 11:0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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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던 전통여성들의 모습 중에 여자(女子)가 따라야 할 세 가지 도리(道理)라고 하여 삼종지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역사에서 대대로 여성들이 이러한 모습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삼종지도가 우리전통사회에 퍼진 것은 17세기 중반이후 그러니까 병자호란이 끝나고 난 뒤이니 유교적인 약속이 여자들을 속박한 건 채 300년도 안 되는 시간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남녀가 다같이 자유롭게 어울렸습니다.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행사나 동네 모임네 별 제약없이 교제한 것입니다. 고려조정에서는 그네뛰기를 금지하기도 했는데 여자들이 틈만 나면 집을 나와 그네뛰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남녀가 구분 없이 시냇물에서 몸을 드러낸 채 목욕을 했으며 절하는 모양새도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고려성문화는 자유로운 연애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여자들은 마음에 드는 남자와 교제한 뒤에 혼인하였습니다. 다만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했으며 신분이 달라도 관아의 허락을 얻으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혼례장소는 신부의 집이었으며 따라서 신랑이 말 그대로 처가에 장가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처가살이는 아이들이 몇을 낳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만 하더라도 여성의 권위가 가정에서 조선시대만큼 낮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가능한 사회모습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고려에서의 여성들의 권리는 남성과 비교적 동등했던 시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여성은 재산상속권, 가계 상속권, 제사상속권 등에서 차별받지 않았으며 딸의 자식인 외손도 가계를 계승할 수 있었고 어머니가 호주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호적에 이름을 기재할 때도 여자이름과 더불어 사위이름도 표시했었는데 이는 사위이름만 적고 여자의 이름을 빼거나 딸이 시집이 가면 남편의 성을 붙였던 조선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즉, 고려는 부계와 모계가 같이 중요시되는 사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편 여성이 재산을 상속받는 것에 대해서 차별받지 않았던 것만큼 제사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해야 했는데 효도에 성별의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결혼한 딸이라고 친정부모를 몰라라하면 오히려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부인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에는 그 재산이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말은 여성의 별도의 재산이 인정되었다는 것으로 노비를 아내가 데려오면 별도의 소유권이 인정된 것입니다. 여성이 비교적 존중받는 모습은 조선으로 넘어가고 나서도 어느 정도 유지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려시대에도 여성에 대해 속박이 아예 없던 시대로 보지는 않습니다. 당시에도 여성들의 남편에 대한 정절이 중시되는 시절이었고 이는 고려시대 이전의 고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여성에 대해서는 재혼에 대해서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 이전의 요석공주도 과부였다가 원효에게 시집가 아들 설총을 낳았으며 고려시대 성종비 문덕왕후 유씨는 홍덕원군에게 시집갔다가 성종과 결혼한 것은 그 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자들에게 열린 재혼의 모습을 고려시대말까지 계속되었고 조선시대에서도 남편에게 버림을 받거나 이혼한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성종 8년에 양반여성이 재가하여 낳은 자식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규정이 생기고 나서부터 여성들의 재가금지가 자리 잡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는 전 계층의 여성들에게 수절이 강요당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그리고 호적을 올릴 때에도 아들 딸 구별없이 출생순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에게도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싶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이름이 없는 경우도 태반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르는 것은 별명이 지나지 않았고 시집간 뒤에는 여자들은 이름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부터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떨어지고 남아선호사상이 퍼졌는데 이 때 유교이데올로기가 일상 속으로 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는 유교문화가 변질되었기에 나온 부작용이었으며 재산을 상속할 적에도 아들 중 맏이에게도 가장 많은 몫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 시기에는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전해지면서 남자들이 첩을 두는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그렇다고 몽골이 침략하기 이전의 고려시대를 남자와 여자가 평등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성리학적 질서가 깊게 내린 조선후기의 모습에 비해 훨씬 평등에 가까웠다는 이야기지 여자들이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점과 생산노동을 제외한 다른 사회활동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성들은 조선시대나 그 이전이나 차별을 당하는 존재였습니다.
고려시대 고종 때의 일이었습니다. 손변이라는 사람이 경상도 안찰부사로 있을 적에 송사가 들어왔습니다. 이 송사는 그들의 아버지가 전 재산을 누나에게 물려준다는 것이었고 남동생은 이를 부당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누이는 유언에서 동생에게 검은 옷과 모자 하나, 짚신 한 켤레, 종이 한 장만을 주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누이는 아버지의 유언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둘의 입장을 들은 손변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를 물으니 누나는 혼인하였고 동생을 일곱 살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손변이 답변하길 당시의 아버지가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고 죽었을 경우 누나는 어린 동생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요. 이에 따라 염려한 아버지가 동생이 커서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고 이 종이에 탄원서를 적어서 관청에 가서 말하면 잘 판단을 해서 일을 처리할 것이라고 하여 이리 유언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두 남매는 부둥켜 울었다고 합니다.
힌편 이러한 손변은 부인을 따뜻이 여겼습니다. 그는 본래 이름이 손습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처가의 가세에 따라 출세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손변의 아내는 왕실과 관련 있는 핏줄이었으나 서족(庶族)으로 당시에는 아무리 뛰어난 관리라도 서족과 혼인한 관리는 높은 직책에 오르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 경우에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지체 높은 가문의 딸과 결혼하는 경우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미 결혼한 부인을 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부인은 재혼을 권했으나 30년간 내조해온 아내를 버릴 수 없다며 출세보다 아내와의 함께하기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손습경은 손뼉치다라는 의미의 벽을 이름으로 하였는데 이는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부부는 함께여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한편 1275년 대부경 박유는 충렬왕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는 고려가 음의 기운이 강해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다고 하며 법적으로 한 사람이 한 아내로 그치게 하고 있으나 원나라 사람들이 들어와 그들의 문화에 따라 인원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장가를 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는 이렇게 되면 수많은 고려여성들이 모두 북쪽으로 흘러가게 될 것을 염려하면서 그가 올린 제안은 신하들로 하여금 여러 부인을 두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품계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둘 수 있는 첩의 수에 제한을 두고 평민들은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두게 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면 짝이 없어 원망하는 이도 없고 인구도 늘어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박유가 이러한 상소를 올린 이유는 당시 공녀제도로 인해 많은 고려여인들이 원나라에 바쳐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충렬왕과 많은 신하들이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고위층 관료 부인들이 반발을 샀습니다. 그리고 연등회가 있던 날. 왕의 행차에 박유가 호위하며 따라나섰는데 ‘저 자가 첩을 두자고 한 늙은이다.’라며 손가락질을 하였고 일제히 욕을 먹게 되었습니다. 박유입장에서는 몽골로 가는 여성들의 차출을 막고자 함이었지만 박유는 졸지에 호색한으로 오해받았으며 아무래도 악용될 소지가 있는 정책이라 백성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높았던 고려여성들의 지위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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