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이 만든 우수한 종이, 고려지
2022. 9. 12. 11:1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728x90
우리나라의 영어 이름 KOREA의 어원은 조선 바로 이전의 왕조 고려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KOREA는 당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제품들의 앞에 붙어 세계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고려청자입니다. 그리고 고려청자뿐만 아니라 세밀한 표현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고려불화 역시 KOREA란 이름이 앞에 붙어 널리 알려졌을 것입니다. 조선 시대 중국과 일본에 수출한 대표적 무역 상품인 인삼도 고려인삼으로 불려 팔려나갔습니다. 그와 더불어 고려라는 명칭이 붙어 주변국들에게 명성이 자자한 상품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고려에서 만든 종이 ‘고려지’입니다.
우리나라의 종이로 알려진 종이는 ‘고려지’이지만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종이를 발명한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은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종이의 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파피루스는 지중해 연안의 습지에서 자라는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 식물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고 속을 가늘게 찢은 뒤, 엮어 말려서 다시 매끄럽게 하여 파피루스라고 하는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당대 이집트는 당대 최고의 문명국으로 도약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종이와 유사한 것이 동양에서 발명되었으니 바로 105년에 후한의 환관 채륜이 만든 종이입니다. 채륜이 서기 105년에 나무껍질, 마, 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그 시기는 우리나라 고구려 태조왕, 백제 기루왕, 신라 파사왕시기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종이도 이에 앞서 발명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체륜은 종이의 제조 과정을 황제에게 알리고 이를 통하여 종이가 문서표기에 활용되며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럼 종이는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되었을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한지의 주원료가 닥이므로 닥나무를 뜻하는 저(楮)를 tag’ 혹은 ‘tiag’이라고 읽었을 2세기, 평남 대동군 남정리 채협총에서 종이와 관련된 문구유물이 발견되었으므로 그 시기가 3세기, 그리고 중국이 어지러운 시기를 틈타 한반도로 이주한 3세기말에서 4세기말이었으니 이중에 종이기술자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담징은 종이, 먹, 채색과 맷돌을 일본에 전해주었으니 그때가 610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2~4세기에 전래된 종이는 7세기에 들어 한반도에서도 자체 생산되어 일본에 전해줄 정도로 상당한 수준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 빛이 아름다워서 백추지라고 부른다' 『계림지』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종이 색깔은 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마치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종이에 대한 애착심이 솟구친다. 이런 종이는 중국에는 없는 우수한 것이다' 『고반여사』
'송나라 사람들이 여러 나라 종이의 품질을 논하면 반드시 고려지를 최고로 쳤다. 우리나라의 종이가 가장 질겨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 더욱 고르고 매끄러웠던 것인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다' 『보만재총서』 조선 영조 때의 서명웅,
“중국에서 나지 않는 것은 외국의 오랑캐로부터 많이 가져다가 쓴다. 당나라 사람들의 시 속에 ‘만전’(蠻?*오랑캐 종이)이란 글귀가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여기엔 다 까닭이 있다. 고려에서는 해마다 종이(*만전)를 조공했다. (중국에서) 책을 만들 때 이것(*고려지)을 많이 사용했다.” 『해동역사』, 한치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종이를 귀하게 여겼으며 중국에서 우산, 부채, 책 표지 등 질긴 종이를 사용해야 할 때는 우리나라의 종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왕실에서도 역대 왕들의 진적을 기록할 때에도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으니 고려 문종 34년에는 고려가 송나라에 대지(大紙) 2천 폭과 먹 4백 정을 보냈으며 이후로도 고려의 종이는 당대 주요 수출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나라에서도 불경지를 고려지로 구해다 썼는데 한 번에 10만 장이라는 막대한 양이 원나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이렇듯 당대의 고려지는 중국의 관료, 문인들이 선호하는 명품으로 고려청자와 비견될만한 것이었습니다. 종이는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로 중국인에게 그 자부심이 대단할 건데 이러한 종이가 오히려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원조 한류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럼 당시 고려의 종이가 유명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재료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입니다. 본래 종이의 원리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나무껍질, 솜, 마 등이 들어갔는데 이렇게 되면 필기할 때 껄끄러운 느낌이 들고 종이 원료 공급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이 찾아낸 재료가 바로 닥나무였습니다. 닥나무는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재배되는 나무입니다. 특히 고려 인종시기와 명종 시기에 걸쳐 닥나무 재배를 명했는데 이것은 불경이나 유교와 관련된 책 발간에 필요한 종이를 공급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닥나무를 종이로 사용한 우리 종이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습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종이인데 이것의 원료가 바로 닥나무인 것입니다. 하지만 온전히 닥나무만을 종이의 원료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려의) 종이는 온전히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간혹 등(藤)나무를 섞어서 만든다. 다듬이질을 하여 모두 매끈하며, 높고 낮은 등급이 몇 개 있다(紙不全用楮 間以藤造 ?搗皆滑? 高下數等).”(권23 토산조)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우리 조상들은 닥나무 외에도 등나무 등을 섞어 종이의 질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원료에서만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 종이 만드는 기술은 우리나라로 전래되었지만 한 번 전수된 기술은 우리의 것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중국의 제지법은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드는 방법인데 우리의 선조들은 긴 섬유를 두드려 균일하게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였습니다. 이른바 도침법입니다. 이것은 고려지를 제작하는 핵심이었습니다. 종이 표면을 여러 번 두드려 면을 고르게 하고 섬유사이에 미세한 구멍을 메우고 광택을 냅니다. 그리고 수분을 먹인 후에는 여러 번 큰 망치를 두들깁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이의 질이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방법은 중국의 종이기술에는 적용하기 어려웠습니다. 중국에서는 닥나무가 아닌 마(麻)나 비단을 종이의 재료로 사용했는데 이 재료는 닥나무에 비해 부드러웠기 때문에 이러한 제작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지를 생산한 곳은 수공업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소(所)라는 행정단위였습니다. 여기에는 해당 수공업 제품의 장인이 있었고 그리고 이를 도와주는 소민이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고려지 뿐만 아니라 청자, 나전칠기, 먹, 칼 등이 제작되었으니 당시 주변국들에게 칭송받았던 고려의 제품들이 바로 소 생산체제에서 나왔습니다.
이러한 고려지는 조선시대에 들어 그 명맥을 이어나갔으니 15세기 초에는 종이를 만드는 일에 거의 천여 명의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제지기술자들을 우대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종이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종이라 할 수 있는 한지는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원료수급과 제조과정의 까다로움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양길에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한지의 과학적인 부분까지 서양보다 뒤처진 것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은 서기 750년에 발간되었음에도 그 보존상태가 뛰어난 것은 당시 만든 우리 조상들의 종이제조술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송나라 문인들 사이에서 고려지가 최고의 선물 중 하나였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래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래지는 서양의 종이와는 달리 오래 시간이 지나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우리의 종이, 그리고 고려지는 바로 우리 조상들의 참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고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명의 역사학자가 찾아낸 직지심체요절 (0) | 2022.09.14 |
---|---|
고려시대 천민출신 집권자 이의민 (2) | 2022.09.13 |
고려시대 장례문화 그리고 고려장 (2) | 2022.09.11 |
생각보다 높았던 고려 여성의 지위 (2) | 2022.09.10 |
고려시대 내시와 환관 (0) | 2022.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