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천민출신 집권자 이의민
2022. 9. 13. 18:4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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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무신정변은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는 이의민라는 최고 집권자가 있었습니다. 이의민이 여타 다른 집권자들에 비해 주목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의민이 천민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경상남도 경주출신인데 그의 아버지는 이선이란 사람으로 소금과 소쿠리를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고 어머니는 연일현 옥령사라는 절의 여종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그는 천민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의민이 어렸을 적에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9층탑에 올라가는 꿈을 꾸었으므로 그는 이 아이가 커서 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의민은 키가 8척에 달했고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행패를 부려 동네사람들에게 근심거리였습니다. 이에 안찰사 김자양이 이들 형제를 잡아다가 심하게 고문을 한 나머지 두 형은 옥중에서 사망하고 이의민만 살아남았습니다. 이에 안찰사 김자양은 이의민을 그를 경군으로 선발하였습니다. 그는 이에 따라 처와 함께 개경에 와서 해가 저물었기 때문에 연수사라는 절에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꿈에서 긴 사다리가 성문으로부터 대궐까지 내려와 그것을 타고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는 수박을 잘하여 의종의 사랑을 받았으며 정중부의 난 때에는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이 당시 이의민이 살해한 사람 수가 가장 많았으며 그는 중랑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1173년 명종 3년이던 해에 김보당이 의종복위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거제에 유폐되었던 의종을 경주로 모셨고 이의민 등이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채 진압하기도 전에 어느 정도 정리된 상황이었습니다. 이의민이 도착했을 즈음에는 의종 복위를 돕던 세력들의 머리를 길가의 좌우편에 늘어놓아 이의민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의민은 이후 인종이 머물고 있는 곤원사라는 절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술을 몇 잔 올리고는 인종을 끌어내어 왕을 등뼈를 꺾어 숨을 끊어버립니다. 그의 비명소리에 껄껄 웃어버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가 사람의 허리를 끊어 숨을 멎게할 만큼 엄청난 힘의 소유자였고 이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지만 그가 왕을 죽였다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습니다.
1174년에는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눈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으나 여기에 개의치 않고 철령으로 진군한 뒤, 사방에서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서경군을 공격하여 이를 격파했다고 합니다. 이의민은 활약은 당시 반란군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연주를 한창 공격하고 있을 적에는 적 수천 명이 진을 치고 구원하고 나섰는데 이의민이 군사를 끌고 나가 싸우면서 적진에 들어가서 말 탄 정작 한명을 죽였더니 적군들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조위총의 난에 큰 공을 세운 이의민은 상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명종 7년에는 조위총이 패잔병을 이끌고 다시 보향산에 모이자 이의민이 8장군을 데리고 공격하여 이들을 격파하였습니다.
그러던 명종 9년(1179년)에 경대승이 정중부 등 무신정변의 주동자를 싹 다 죽이고 자신의 라이벌까지 제거하며 실권을 잡았습니다. 조정관원들이 이를 축하하자 경대승이 임금을 시해한 자가 아직도 살아있는데 무슨 축하인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임금을 시해한 자란 바로 이의민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겁을 먹은 이의민은 자기 집 주변에 군사들로 둘러치고 경대승과 도방 세력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 집 문전밖에도 대문을 세워 밤마다 경비했으며 이것을 여문이라고 했습니다. 이후 이의민은 변방지역의 병마사로 있으면서 누군가가 경대승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는데 이의민은 이 잘못된 정보를 듣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에 이의민은 더욱 경대승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이의민은 고향 경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경대승은 무신들의 협의체를 중방을 없애버리니 중방는 무신최고 권력자가 혼자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기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약화시켜 경대승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키려 했으나 4년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 명종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합니다. 그것은 경주에 가 있던 이의민을 다시 부른 것입니다. 왕이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이의민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명종은 이의민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에게 정3품에 해당하는 병부상서라는 관직을 내리고 사자를 보내 설득한 끝에 관직에 복귀시킵니다. 그리하여 그가 최고 1인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려백성들은 이의민을 두려워한 고려임금의 유약함에 개탄했다고 합니다. 한편 경대승이 중방의 권한을 약화시킨 뒤, 그가 요절하는 바람에 이의민이 실권을 잡았으니 이 때부터 고려에게 본격적인 망조의 길로 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신정권시기에는 전국 도처에서 반란이 들끓었습니다 명종 23년에는 비교적 큰 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으니 바로 운문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의 난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와 현을 습격하며 세력을 키우니 이에 왕은 대장군 전존걸을 파견하였고 이에 통솔자로 여러 부하장군들이 파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이의민의 아들이 이지순도 포함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즈음에 이의민은 헛된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의민은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오색무지개가 겨드랑이에서 일어나는 꿈을 꾸었고 그 후로 더욱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 이야기 중에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위왕설(十八子爲王說)이 있었으니 이의민에 이 이야기에 흡족해하며 왕의 자리를 꿈꾼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 이의민이 경주출신이었으므로 내심 이들과 내통하여 왕이 될 생각이 있었던 즉, 김사미, 효심과 내통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 이진순도 본래 탐욕하여 의복, 식량, 신, 버선 등을 주며 대신 금은 보화를 받은 바, 이러한 경로를 통해 정보가 새어나가 정부군은 여러 번 패전했습니다. 전존걸은 본래 뛰어난 장수였지만 이지순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며 법으로 그를 처단하면 이의민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요. 그렇다고 이지순을 가만히 놓아두자니 적군이 강해질 것이니 이를 어찌 하는가 하며 한탄하였고 결국 자살하게 됩니다. 이후에 이 난에 대해서는 본래 진압이 쉽지 않았는데 그것을 이의민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꾸민 이야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명종 24년에 이의민은 공신에 책봉되었고 문무백관이 그의 집으로 와서 축하를 하니 말그대로 이의민의 천하가 되었습니다. 그가 인사권을 쥐고 흔들었으며 뇌물을 받아 관직을 주는 것은 예삿일이었습니다. 그 도가 지나쳤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주민들의 집을 헐어 자신의 저택을 늘렸으며 이의민의 부인은 여종을 시샘해 때려죽이는가 한편 남자종과 간통하니 이의민은 그 종을 죽이고 처를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며 자신의 처로 만들었다가 버리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지영, 이지광의 횡포도 심했다고 합니다.
이의민은 최후는 예상치 못한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명종 26년에 이지영이 최충수의 집비둘기를 강탈하자 이에 분노한 최충수가 형 최충헌을 끌어들여 미타산 별장에 가 있던 이의민을 죽입니다. 이에 분노한 이지광과 이지순이 길거리에서 최충헌, 최충수 부대와 맞닥뜨렸으나 형세가 불리함을 알고 도주하였습니다. 이지영은 도망가기 위해 다리를 놓을 때에도 그 비용을 아전과 백성들에게 부담시켰으니 그 폐해가 컸습니다. 최충헌은 장군 한휴를 보내어 잔치를 벌이고 있던 이지영의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지순과 이지광이 잡아 죽이게 되므로 이의민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전국을 돌면서 귀양보내거나 없앤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출세가였지만 잔혹한 권력사용으로 이의민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천민 출신인 그에게 뛰어난 정치를 바라는 건 무리일까 싶지만 적어도 권력을 사유화하여 깡패처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역사에 남는 위인이 되고 고려의 역사도 좀 더 바뀌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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